김대동 한국국제협력단 글로벌 협력의사
나는 한국국제협력단(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 KOICA)을 통해 선발된 글로벌 협력의사로 ‘젊은 대륙’ 동아프리카에 위치한 탄자니아 무힘빌리 음로간질라(Muhimbili National Hospital Mloganzila) 국립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탄자니아는 2023년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이 1,211불 정도이며, 인구수는 한국보다 많은 6744만 명이다. 의사 대 인구의 비율은 1대 20,000으로, 의사가 많이 부족한 나라다. 현지 외과 의료진의 이야기에 따르면, 수술이 가능한 외과의사가 100명도 채 안 된다고 한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 속으로 파견된 한국의 외과의사로서, 나는 현지 의료진의 역량 강화와 현지인 진료를 돕는 외과 전문가로서 활동하고 있다.
작년 여름, 기대감과 설렘을 가지고 탄자니아에 들어와 이곳 사람들의 ‘까리부(Karibu, 환영)’에 ‘아싼떼(Asante, 감사)’로 화답하며 첫날을 시작했던 그때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 사람들과 인사를 마치고 병원 복도를 걸어가는데, 복도 끝에서 두세 살쯤 되어 보이는 현지 여자아이가 나를 향해 손을 벌리고 아장아장 걸어왔다. 모습이 귀여워 나도 마주보고 손을 폈더니, 처음 보는 외국인인 나에게 다가와 품에 꼬옥 안겼다. 아이의 마음이 이곳 탄자니아 사람들의 마음 같아서 나도 아이를 꼭 안고 귀한 교감을 나누었다.
출근 시 자차로 1시간 10분을 운전해서 가야 하는 무힘빌리 병원에서 나는 주로 수술 업무와 환자 자문(consult) 업무를 하고 있다. 대장암과 항문 관련 질환은 내게 더 익숙하므로 현지 의료진에게 수술법과 치료 원칙에 대해 도움을 주고, 내가 익숙하지 않은 질환에 있어서는 서로 의견을 나누면서 조금 더 나은 치료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산부인과 질환 중 난소암이나 자궁암에서도 대장이나 직장을 침범하는 경우에 암조직을 일괄절제하기 위해 수술을 도와주고 있다. 또 가끔씩 탄자니아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응급 질환에 대해 수술이나 자문을 해주고 있다. 작은 도움이지만 크게 생각해주고 감사를 표하는 분들이 많아 황송하다.
하루는 수술 중에 외과과장인 Dr. 에릭에게서 전화가 왔다.
“김 교수님! 어떤 환자분이 선물을 맡겨 놓고 가셨어요. 찾아가세요”
수술을 마치고 쇼핑백 속에 들어 있는 선물 하나를 받았다. 궁금한 마음에 열어보니, 내 얼굴이 크게 붙여져 있는 포토시계가 들어 있었다. 지난번 외래 때 꼭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자고 했던 환자분이 내 얼굴만 크게 확대해서 벽걸이 시계로 만든 것이었다.
당혹감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집에 걸어두려니 낯간지럽고, 지인에게 쓰라고 주는 건 더더욱 안 될 일이다. 아빠의 사면초가가 안쓰러웠는지 둘째 아들이 자기가 결혼하면 집에 걸어두겠다며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제니는 60세가 된 여성으로 단정하고 고상해 보이는 분이었다. 병원에 오신 이유를 물었더니 30년 전 출산 이후에 생긴 변실금을 치료하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다. 변을 조절하지 못해 늘 패드를 하고 있어야 하고 그로 인해 사람들과의 친밀한 관계도 없이 혼자 지내시는데, 이제 자기가 더 늙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시기가 오면 변실금으로 인해 간병하는 분께 큰 어려움을 드릴 것 같아 어렵게 용기를 냈다고 했다.
사하라 사막 이하 아프리카가 공통적으로 그렇듯이 탄자니아에서도 경제적으로 가난한 여성의 90%가 집에서 출산을 하는데, 분만 관련한 의료 접근성이 부족하다 보니 출산 시 괄약근 손상을 포함한 여러 가지 분만 관련 합병증이 많다.
진찰을 해보니 회음부는 거의 없이 항문과 질이 맞닿아 있었고, 항문괄약근은 9시 방향부터 2시 방향까지 끊어져 있어 이미 변을 조절하는 기능을 상당 부분 상실한 것으로 보였다.
“그동안 어떻게 참고 지내셨어요?”라는 나의 질문에 제니는 출산 후에 생긴 변실금으로 인해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당하고 지금까지 혼자 살았다면서, 어쩌면 스스로 감내할 수 없었을 것 같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리고 한순간도 품위를 잃지 않은 모습으로 꺼내 놓았다.
제니는 출산 당시 항문괄약근이 파열되는 3도 회음부 열상으로 즉각적인 치료를 받았으나 괄약근이 제대로 봉합되지 않았고, 그 후 한차례 더 산부인과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상처 부위 감염으로 심한 상처 통증에 시달렸다. 결국 많은 양의 농과 함께 괄약근이 다시 벌어져 버렸고, 그때의 통증이 너무 심했기에 다시는 수술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오늘까지 온 것이었다.
제니는 처음에 수술을 거절했다. 다시 그때의 통증을 경험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과거의 경험이 큰 상처가 되었음을 알고 있기에 충분한 설명과 함께 다시 한번 더 수술에 대해 조심스러운 권고를 드렸다. 몇 주가 지나서 오랫동안 고민한 후에 제니는 수술대에 올랐고 괄약근 봉합수술 및 회음부 재건술을 시행하였다.
제니의 수술은 이전 수술의 유착으로 인해 쉽지 않았고 다소 비만인 그녀의 체형도 영향을 주었지만, 다행히 끊어진 괄약근을 찾아 이중으로 봉합수술을 하였고 새롭게 회음부를 재건하는 수술을 할 수 있었다. 일주일 뒤 큰 문제 없이 퇴원하였으나 집에서 주저앉으면서 상처가 벌어졌고 약간의 감염이 있었다. 다행히 봉합된 괄약근은 아무런 이상이 없어 얼마간의 입원 치료 후 제니는 잘 나아서 퇴원하였다. 외래에서 상처가 아물고 이제는 변은 물론, 방귀로 어느 정도 참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고 말하며 기뻐하는 모습에 나도 감사 기도를 드렸다.
마지막으로 만난 외래에서 제니는 흥분된 억양으로 자신이 생전 처음으로 차를 샀다고 했다. 과거에는 사람들을 피했지만 이제는 사람들도 만나고 여기저기 여행도 다닐 수 있을 것 같아 차를 샀다면서, 그녀는 아이처럼 기뻐하며 들떠 있었다.
30년 동안 힘들게 살았는데 이제는 너무 만족하고 감사하다고 말하는 그녀를 보며, 부족한 나를 통해 작은 도움이라도 드릴 수 있는 상황에 감사했다.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다던 그녀의 요청사항은 내 사진을 한 장 찍어서 집에 걸어두고, 매일 기도 시간에 내 사진을 보며 나를 위해 기도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손사래를 쳤지만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제니를 위해 현지 병원의 외과 과장을 불러 세 명이서 나란히 사진을 찍었는데, 그중 내 얼굴이 시계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후 제니는 병원 홈페이지에 ‘칭찬합니다’ 동영상도 올렸다. 스와힐리어를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제니가 보내 준 감사한 마음과 함께 내 몫이 되어버린 부끄러운 마음은 더욱 커졌다.
제니의 수술 이후로 많은 항문괄약근 손상 환자가 병원을 찾아온다. 20대부터 40대까지 연령도 다양하고, 스스로 오거나 가끔씩 남편이 데려오기도 한다. 현지 병원의 산부인과 의사는 가끔 일정을 공유하지 않고 환자를 수술실에 눕혀 놓고는 나를 찾아 도움을 청하기도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끊어진 괄약근을 봉합하고 회음부를 재건하면서, 이분들의 삶이 다시금 빛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첫아이를 낳고 바로 손상된 젊은 새댁을 위해 기도하며, 오랜 세월 잊혀진 남편의 사랑을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건강하게 자신이 속한 공동체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또 다른 환자들의 삶을 축복한다.
개울에 돌이나 흙더미를 드문드문 놓아 만든 다리를 ‘징검다리’라고 한다. 아무렇게나 간단하게 놓으면 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징검다리의 핵심인 커다란 노둣돌이 놓일 자리를 보고, 노둣돌이 움직이지 않도록 먼저 모래와 작은 자갈을 깔아 기초작업을 하는 적심을 해야 제대로 된 징검다리를 놓을 수 있다. 징검다리는 건너는 사람들의 다리에 의해서 비로소 연결되는 다리이기 때문에, 이미 다 이어져 있는 다리보다 더욱 의미가 있고 운치가 있다.
외국에서 살다 보면 누구나 조금 더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특히 요즘에는 한국 사회가 서로 더 많이 대립하고 양극화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또한 의대 증원 갈등을 둘러 싼 갈등 속에 작은 힘을 보태지 못한 채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나의 모습이 죄스럽게 느껴진다.
여기저기 끊어지고 분절화된 우리네 사회를 하나로 이어주기 위해서는 징검다리처럼 자기희생을 하는 수많은 노둣돌이 있어야 하고, 그 아래 묵묵히 제 역할을 하며 마음을 쌓아가는 자갈과 모래의 적심(積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안다.
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관계의 회복과 지속을 뜻하고, 이를 위해서는 이음과 매개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차이와 다름을 관용하는 모습이 필요하다. 내가 먼저 기꺼이 노둣돌이 되고, 노둣돌 아래 놓일 작은 자갈이나 모래가 되어 준다면 우리는 소외와 고립의 개울을 건너 새로운 이상향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아내와 나는 말라리아 중 치사율이 높다는 열대성 말라리아에 걸려 현지 병원 중환자실에서 일주일가량 치료를 받았다. 고열과 근육통, 호흡곤란으로 인해 쉽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돌봄과 치료를 제공하는 자리(care-giver)에서 돌봄과 치료를 받는 자리(care-receiver)에 있어 보니 현지 의료진의 속 깊은 사랑의 마음을 느끼며 조금 더 가까운 사이가 된 것 같다.
부족하지만 나도 이곳에서 작은 자갈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탄자니아와 한국을 잇는 징검다리를 만들기 위해 협력하는 모든 노둣돌과 자갈과 모래들에게 지치지 말고 힘내라고 말하고 싶다.
누가 알겠는가? 고대 주나라 문왕이 아이디어를 내어 대나무를 짠 부교(浮橋)가 물 위에 깔리고 그 후 지금과 같은 교각이 발전한 것처럼, 우리의 작은 노력과 희생들이 모여 언젠가 너와 나, 우리와 그들, 세상과 또 다른 세상을 이어주는 아주 튼튼한 다리가 되어 줄지 말이다.
마음이 춥고 힘들고 아픈 사람들에게 따뜻한 봄이 빨리 오길 바라고 우리의 소중한 가치를 위해 힘쓰시는 이 땅의 모든 징검다리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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