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순 순천향대구미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본인 부고. 최◯◯. 한가위를 맞아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이동하는 중에 갑자기 뜬 문자였다. 전공의 때 선배였던 그가 정말, 갑작스레 세상을 떴다. 갑자기 마음이 착잡해졌다. 나보다 어린 선배를 보내는 일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의 지난 삶을 돌아보게 한다.

누군가 나에게 의사 생활 중 어느 시절이 제일 기억에 남느냐고 묻는다면, 내게 가장 즐겁고 슬펐던 시간은 전공의 시절이라고 주저없이 대답할 것이다. <인사이드 아웃>이란 유명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조이’라는 감정과 ‘새드’라는 감정이 서로 손을 잡으면서 영화를 마친 것처럼 이 두 감정은 분명히 공존한다. 돌이켜 보면, 의사는 감정을 최대한 배제해야 할 직업임에도 나는 늘 감정에 솔직했었다.

2007년 9월, 소아청소년과 혈액종양 전공의 1년 차로 차트 정리 및 항암요법 지시에 바쁜 하루였다. 갑자기 보호자로 보이는 한 아가씨가 소아청소년과(이하 소청과) 병동으로 들어오면서 간호사들에게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와, 은미아이가? 이제 아가씨 다 되었네.”
“아, 네.”
“요즘 몸은 좀 어때? 아버지는?”
“그동안 주로 외래에서 수혈만 하고 갔는데 요즘 몸이 많이 안 좋아서 교수님이 입원하라고 하시네요. 그래서 올라왔어요.”

소청과 환아의 보호자가 아니라 환자였다. ‘재생불량성 빈혈’, 그녀의 진단명이었다. 만 18세가 넘는 성인 환자였지만 일곱 살 때부터 우리 교수님이 계속 치료했다는 이유로 혈액종양 내과로 전과하지 않고 그동안 소청과에서 치료를 받아왔는데, 최근에 속이 안 좋다는 증상이 3개월 넘게 지속되어 입원을 하게 된 것이었다.

어린 소청과 혈액암 환아만으로 일이 많아서 허리가 휘어질 지경이었던 전공의 1년 차였던 나는 화가 났다. ‘아니, 나이가 벌써 스물두 살인데 내과로 보내시지, 나이 많은 환자까지 내가 봐야 하나’란 생각에 간호사들에게 투덜거렸다. 내 불평을 듣던 중 마음이 선하고 연륜이 있는 A 간호사가 조심스레 말해 주었다.

“성 선생님, 은미는 엄마가 없는 불쌍한 아이예요. 그러니 잘해 주세요.”
그 말에 나는 우선 짜증나는 감정을 누르고 간단한 히스토리를 듣고 진찰을 하기 위해 그녀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1년 차 성명순입니다. 무슨 일로 입원하셨나요? 이제 수혈 준비는 다 되었는데요.”
“아, 교수님께서 내시경도 한번 하고 전반적인 검사를 해보자고 권하셨어요. 속이 안 좋은 지 좀 오래되었거든요.”

비록 나는 소청과 전공의였지만 스물두 살 고령의 소청과 환자를 위해 소화기파트 교수님께 내시경을 직접 해주셔야 한다고 부탁드리고, 내시경 어시스트를 하며 따로 컴퓨터 촬영을 준비했다. 그때는 사실 내 감정에만 충실했기에 이 고령의 환자를 데리고 있는 혈액종양 교수님의 환자에 대한 깊은 사랑과 열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원 기간 동안 오전, 오후 회진 준비를 하면서 나는 이 성인 소청과 환자와 친해지기 시작했다.

은미는 일곱 살 때부터 아팠고, 아홉 살 때부터 환자 생활을 시작했다. 엄마는 어린 은미가 투병하던 중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셔서 홀아버지 손에서 엄마 없이 혼자 자랐다. 요즘은 커피에 관심이 많아 바리스타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혹시 남자친구나 친한 친구들은 없니?”
일주일 넘게 면회 오는 친구가 한 명도 없길래 살짝 물어보았다.
“아, 네. 별로 없어요. 어릴 때 병원에서 같이 놀던 친구들은 거의 다 죽사었거든요.”
정말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은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 이 아이에게는 벌써 죽음이 먼 이야기가 아니구나. 어릴 적부터 아픈 친구들을 봐왔고, 자기도 아팠고, 그동안 친구들을 보내야만 했었던 은미는 이제 자기도, 이 대책도 없고 기약도 없는 병명 앞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다행히 모든 검사들은 정상이었다. 결과 보고를 드리니 이 아이의 성장과정을 모두 봐오신 혈액종양 교수님이 한숨을 쉬시며 차분히 말씀하셨다.

“우울증일 수도 있을 거예요. 엄마가 갑자기 떠나고 나서 아빠한테 혼자 크는 동안 힘들었을 겁니다. 유일한 치료 방법인 골수 치료도 아버지와 골수가 맞지 않으니 못하고 있고.”

은미의 아버지는 막노동자였다. 은미에게 드는 치료비를 벌기 위해 새벽에 밥을 해놓고 나가기 바빴고, 어린 은미는 혼자서 그 밥을 먹고 학교를 갔다. 그 와중에 아프면 혼자 병원에 왔고, 그때마다 우리 교수님은 은미를 치료하고 돌봐 주셨던 것이다.
입원해 있는 동안 속이 쓰릴 때마다 주었던 생리식염수는 위약효과로 효능이 있었고, 모든 소화기계통 검사는 정상이었다.

이런 사실을 기반으로 정신과 상담이 들어갔다. 심리상담사가 한참 동안 병실에서 상담을 하고는 주치의였던 내게 “우울도가 심해요”라는 말을 살짝 남겼다. 그래서 궁금한 마음에 은미의 상담일지를 보게 되었다. 거기에는 ‘진짜 왜 그러는지 모르겠음’ ‘아빠는 나만 보고 있음’ ‘아빠 두고 갈 것을 생각하면 겁이 남’ ‘아빠가 불쌍해’ 등등 은미의 속마음이 적혀 있었다.

소청과 전공의로서 어린아이들, 기껏해야 사춘기 녀석들과 서로 날을 세우다가 사탕이나 작은 과자 같은 것들로 위로하며 정을 쌓았는데, 이제 성인 여성 환자까지, 내가 어떻게 위로하고 치료를 이끌어가야 하는 것일까? 소청과 전공의가 된 이후 처음으로, 이 최고령 환자로 인해 나는 이런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남은 시간이 어찌 되든지 아무런 지병이 없는 이십 대 아가씨처럼 은미가 하루하루를 맞이했으면 했다. 커피를 좋아하니 바리스타가 되기 위한 공부도 미루지 말고, 화장도 좀 하고 멋도 내면서 그냥 평범한 이십 대 아가씨처럼 다니자고 말했다. 다행히 우울증 치료제에 효과가 좋아서 은미는 웃으면서 퇴원했다. 이후에도 외래를 주기적으로 다니면서 가끔 시간이 되면 어느 평범한 이십 대 여자애처럼 예쁘게 하고는 병동에 나를 보러 왔다.

“어머, 선생님. 아기를 가시셨네요. 엄마 되시는 거, 미리 축하드려요. 저도 아기 좋아하는데.”

은미의 말에 차마 “너도 할 수 있어”라는 희망의 말을 전하지 못하고, 그냥 “고마워”라고 답했다. 한 여자로서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는,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평범한 일이 그 아이에게는 가질 수 없는 꿈이었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나는 전공의 4년 차가 되었다. 그리고 첫 아이를 출산하고 엄마가 되었다. 그해 가을, 갑자기 은미가 입원을 했다. 열이 3주 이상 지속되고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외래에서 버티다가 입원을 하게 된 것이었다.

“뭐예요? 제가 스물네 살이나 된 환자를 여기서 치료해야 하는 건가요? 이분은 성인 아닌가요?”

병동을 지나가다가 전공의 1년 차가 간호사들에게 불평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아, 3년 전에 나도 저렇게 말했었지.’

은미의 상태는 입원 중에도 전혀 호전되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골수 검사를 시행했다. 불행히도 그녀의 새로운 진단명은 ‘혈구탐식성 림프조직구증’이었다. 곧 항암 치료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항암 치료가 그녀의 빈혈 수치와 혈소판을 감소시켰고, 회복을 위해 수혈을 계속해야만 했다.

더 안 좋은 것은 은미의 몸이 수혈에 대한 알레르기가 생겨 수혈을 할 때마다 아나필락시스가 온다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알레르기 영역의 전문가가 많아서 조절이 가능했을 테지만, 그 당시에는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치료를 위해 항암제 치료를 하면 수혈이 필요하고, 수혈을 하면 환자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마지막 대책안은 최대한 항암제 용량을 줄여서 유지하자는 것이었다.

은미는 더욱더 지쳐갔다. 항암 치료 와중에도 열은 매일 나고, 힘도 빠지고 속도 안 좋았다. 무엇보다 자기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생각에 더 우울해져갔다. 나는 가끔 오후 회진마다 은미를 붙잡고 말했다. 너희 아빠를 생각해서 더 열심히 버텨 보자고. 선생님도 엄마가 되고 나니 자식이 아픈 것을 볼 때마다 힘들지만, 자식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어 준다고. 너희 아버지에게도 너는 그런 존재일 것이라고.

그날도 오후 회진을 마치고 퇴근 준비를 하다가 갑자기 은미와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퇴근을 뒤로하고 병실을 방문했다. 은미는 저녁식사 중이었는데, 환자식 대신 선지국밥을 먹고 있었다. 은미는 아버지가 사 오셔서 몰래 먹고 있었다며 살짝 웃어 보였다.

은미 아버지는 일주일 전부터 은미가 계속 먹고 싶다고 해서 사왔다며, 원래 안 되는 것도 알고 선생님께도 너무 죄송하지만 은미가 죽기 전에 꼭 먹이고 싶어서 그랬다고 병실 밖 복도에서 울먹거리며 말씀하셨다.

“아버님,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버님, 은미는 이번에도 괜찮을 거예요.”

나는 막노동 일로 거칠어진 은미 아버님의 손을 붙잡으며 위로했지만, 아버님은 “야가 요새는 밤마다 불안하고 잠이 안 온다고 하네요. 지도 이제 가야 된다고, 아빠 혼자 잘 있어야 한다고 계속 말을 하네요.”라고 말했다.

아버님을 진정시킨 뒤 은미에게는 별일 없을 거라고, 이번에 퇴원하면 같이 국밥 먹으러 가자고 말하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5개월 된 딸을 품에 안고서, 나는 울먹거리던 은미 아버님을 생각했다. 그래, 우리 딸, 엄마 옆에 있어 주어서 고맙다.

국밥을 먹고 정확히 36시간 뒤 은미는 저혈압 쇼크가 와서 갑자기 떠나버렸다. 그 아이는 자기가 갈 것을 정확히 알았던 것이다. 병실에 장례사가 와서 은미가 누웠던 침대를 장례식장으로 데려갔다. 간호사들이 병실을 치운다고 울먹거리면서 들어가 보니 먹다 만 국밥이 냉장고에 들어 있었다. 그렇게 먹고 싶다고 했는데, 다 먹지도 못하고 갔던 것이다.

나는 장례식장에 가지 못했다. 사실 가고 싶지 않았다. 대신 국밥 값을 사회복지팀을 통해 아버님께 전해드렸다. ‘아버님, 은미가 먹고 싶어 한 것 앞으로 많이 사주세요.’
이렇게 나에게 최고령 환자였던 은미를 내 가슴 한편에 묻었다.

나는 현재 살아있고 우리 딸들을 키우면서, 자주는 아니지만 은미의 우울했던 표정과 은미 아버님의 거칠었던 주름진 손을 가끔 떠올린다. 어차피 우리네 삶은 계속되는 것이니까. 그래서 나는 소청과 의사로 또 다른 아이들을 만나고, 그들의 부모를 만나야 할 운명이니까. 하지만 요즘 나는 환자를 보내고 남은 우리 의사에게도, 우리만의 위로가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수상소감 성명순 순천향대구미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성명순 순천향대구미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성명순 순천향대구미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돌이켜 보면 제 인생에서 한번에 되는 것은 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의대 합격, 가정을 꾸려서 제 아기를 가지는 것, 전문의가 되는 것, 모두 다 녹록지 않았습니다. 요행이라는 단어는 제 인생에서 거리가 멀었던 것 같습니다.

한미수필상 수상도 네 번의 도전 끝에 되었습니다. 이번에 수상해서 매우 기쁘지만 한편으로 그 동안 낙선을 했기 때문에 매년 환자들을 생각하면서 글을 쓰고 재도전하는 일은 저의 루틴이 되었습니다.

수필을 쓰는 것은 짧은 진료시간 동안 진료실에서 표현하지 못한 제 진심을 표현하는 수단인 동시에 환자들과 환자 보호자님들과의 소통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수상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이 루틴은 계속 지속될 것 같습니다.

이 십년의 시간동안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면서 참 힘들었지만 제 소명으로 생각하고 지금까지 버티며 이 길까지 온 것 같습니다. 중학생부터 의사 됨을 열망했지만 부족했던 저에게 의대 재도전의 기회를 만들어 주신 대구카톨릭의대 전 학장인 박정한 교수님과 부족한 전공의였던 저를 이끌어 주시고, 이 글을 쓸 수 있도록 해주신 제 의국 소청과 혈액종양 전 하정옥 교수님 두 분에게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전공의 시절동안 서로 힘이 되어 준 저희 동기 두 분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아직 부족하지만 제 글이 어수선한 이 시기에 다시 한번 의사와 환자, 환자 보호자간의 따사로움을 생각하게 되는 글이 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과 함께 글을 마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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