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재헌 웨스턴대 슐린의대 교수
“근무시간 의미 없는” 역량 기반 교육
교수가 교육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
“값싼 노동력 구조 깨고, 교수들 변해야”
의정 갈등으로 전공의가 사라지자 수련환경 개선 필요성은 오히려 커졌다. 수련환경을 바꿔야 한다는 데는 모두 동의한다. 관건은 ‘어떻게’이다. 정부와 국회는 주 80시간인 전공의 근무시간을 단축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36시간이던 연속근무 시간을 24시간으로 제한하는 법안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를 통과했다.
전공의 근무시간 단축은 이미 ‘대세’가 됐다. 문제는 근무시간 단축이 수련교육 질 저하로 이어지지 않도록 체제를 정비해야 한다는 데 있다. ‘과도기’에 놓인 한국 수련교육체제를 둘러싼 논쟁을 지켜본 이재헌 캐나다 웨스턴대 슐릭의대 정신과 교수는 ‘근무’보다 ‘교육’에 방점이 찍힌 수련체계로 재정비해야 할 시기라고 강조했다. 캐나다와 한국 수련체계를 모두 경험한 이 교수는 결국 “교수들이 변해야 한다”고 했다. 이 교수는 웨스턴대 런던헬스사이언스센터(London Health Science Centre, LHSC) 빅토리아병원(Victoria Hospital) 정신과에서 진료와 연구, 교육을 수행하고 있다.
“의미 없는 근무시간”…역량 중심으로 미달 시 수련 연장
이 교수는 지난 17일 청년의사와 화상 인터뷰를 통해 “근무시간이 의미 없는” 캐나다 수련체계를 자세히 소개하며 이같이 말했다. 한국에서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 논의는 근무시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전공의법 제정으로 주 100시간이던 근무시간이 주 80시간으로 단축된 게 대표적이다. 현재는 주당 근무시간을 60시간으로 단축하는 방안이 논의 중이다.
하지만 캐나다에서는 이런 논쟁 자체가 의미 없다. 모든 수련프로그램은 역량 중심으로 계량화돼 있기 때문이다. 캐나다 수련프로그램은 ‘몇 시간 일했는가’가 아니라 ‘어떤 역량을 습득했는가’를 기준으로 한다. 웨스턴대는 Royal College of Physicians and Surgeons of Canada(RCPSC)이 마련한 전공의 수련에서 역량 기반 교육(Competency-Based Medical Education, CBME)을 구현하기 위해 CBD(Competence by Design) 모델을 개발해 운영하고 있다.
캐나다 정신과 전공의(레지던트) 수련은 5년제로 연차별로 정해진 환자군, 시술 횟수 등을 충족해야 진급할 수 있다. 웨스턴대 슐릭의대 정신과 전공의 수련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연차별로 이수해야 하는 역량이 항목으로 세분화돼 있다. 이를 달성하지 못하면 수련을 연장해야 한다. 예를 들어 전공의 3년 차 소아청소년정신의학 로테이션에서는 최소 ADHD 환자 1명, 트라우마 환자 1명, 발달장애 동반 환자 1명을 진료해야만 평가가 완료된다.
이 교수는 “전공의마다 포트폴리오가 있고, 환자 케이스마다 교수의 평가가 남는다. 분기마다 3시간 반짜리 회의를 두 번 열어 전공의 전원을 심사한다”며 “정신과 전공의는 성인 환자, 소아청소년 환자 케이스를 일정 건수 이상 평가받아야 한다. 미달하면 수련기간이 자동으로 연장된다. 실제로 2년에 한 명꼴로 유급자가 발생한다”고 말했다.
목요일은 '전공의 없는 날'…“교육 전담 시간 보장”
특히 전공의가 배울 시간을 제도적으로 보장한다. ‘티칭 데이(Teaching Day)’가 대표적이다. 이 교수는 “매주 목요일은 병원에 전공의가 나오지 않는다. 환자를 보지 않고 교육만 받는다”며 “교수들은 회의 때마다 ‘레지던트에게 의존하지 말라’는 점을 확인한다”고 말했다. 전공의를 학습자로 보기에 한국처럼 전공의가 주치의를 맡는 경우도 없다고 했다. “교수가 담당하는 환자를 교육 차원에서 전공의가 잠시 본다는 개념”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한국에서는 전공의가 없으면 병원이 마비되지만, 캐나다는 전공의가 없어도 병원이 돌아가도록 구조를 짜놓는다”며 “교육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임상 활동을 멈추는 것 자체가 제도화돼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전공의가 교육에 참여해 병원에 없는 동안 환자 상태가 변하면 교수가 직접 진료를 보고 인계한다”며 “전공의는 환자를 책임지는 노동력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이라는 전제가 확고하다”고 강조했다.
전공의들은 보통 오전 8시 30분 출근해 오후 4시 30분까지 근무한다. 이 교수는 “오후 4시 30분이 되면 전공의는 퇴근하고 이후 진료는 당직 인력이 맡는다. 야간 당직을 서면 다음 날은 반드시 쉬게 하는 ‘포스트콜 오프(post-call off)’ 제도가 보장된다”고 말했다. 응급실에 대기 중인 환자 수가 특정 인원을 넘어가면 교수가 현장에 와서 지원해야 한다. 이는 “전공의가 ‘독박’을 쓰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라고 했다.
수련 과정에서 전공의의 권리 또한 규정으로 보호된다. 휴가, 병가, 육아휴직이 세부적으로 마련돼 있다. 이 교수는 “휴가 사용조차 논란이 되는 한국과 달리, 캐나다에서는 제도적으로 보장돼 있어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며 “결국 시스템이 교육의 질을 담보한다”고 강조했다.
‘교육 보호 시간(Protective Time)’이 보장되는 만큼 평가도 엄격하다. 교수들은 위원회를 구성해 분기마다 7시간 동안 모든 전공의의 포트폴리오를 훑어보고 진급 여부를 판단한다. 평가 기준이 세분화돼 있고 양식도 많아서 교수들 사이에서는 ‘평가 피로(Evaluation Fatigue)’를 호소하기도 한다. 이 교수는 “전공의 4명을 전담해 포트폴리오를 리뷰하고 평가서를 만드는 데 하루가 걸린다”고 했다.
“교육이 곧 업적”…교수가 교육에 전념하도록 지원
이처럼 캐나다 수련병원이 전공의에게 학습자로서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이유는 교수들이 진료뿐 아니라 교육을 책임지는 구조가 제도화돼 있기 때문이다. 교수는 전공의가 환자를 진료·시술·판단하는 과정 전체를 직접 관찰·지도·피드백하는 슈퍼비전(Supervision) 역할을 한다.
이 교수는 “캐나다 교수는 단순히 진료와 연구만 하는 게 아니라 반드시 교육에 참여해야 한다”며 “계약서에 교육·연구·진료·행정 비율이 명시돼 있고, 교육 비중이 0%인 교수는 없다”고 말했다.
교육 활동은 꼼꼼히 기록돼 연말 업적평가에 반영된다. 전공의 케이스 리뷰, 강의 준비, 시험 문제 출제 같은 활동까지 모두 시간으로 계산돼 점수화된다. 전담 교수를 지정해 교육 책임을 강화하고, 별도 수당과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제도도 마련돼 있다. 전공의들이 하는 교수평가제도 운영된다. “질 낮은 강의 자료를 그대로 쓰면 피드백이 곧장 돌아온다. 교육의 질을 유지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다. 이 교수는 전공의들이 하는 평가를 통해 ‘올해의 임상 슈퍼바이저’로 뽑히기도 했다. 웨스턴대 슐릭의대에 정신과 교수로 부임한 지 3년 만이다.
이 교수는 한국과 다른 캐나다 수련환경을 보면서 처음으로 “전공의 할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전공의에 비해 캐나다 의대 교수는 생각보다 “힘들다”고 했다. 그렇다고 “삶의 질이 떨어질 정도는 아니다.” 이 교수는 “기본적으로 교수에 대한 존경심이 있어서 너무 힘들지는 않다. 또 여기서(캐나다에서) 수련 받은 의사들은 교수는 전공의를 그렇게 가르쳐야 한다고 당연하게 여긴다”고 했다.
한국에 필요한 해법은?…“값싼 노동력 구조 깨고, 교수들이 변해야”
그렇다면 한국이 수련 환경을 바꾸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이 교수는 가장 먼저 ‘전공의 월급’을 수련병원이 책임지는 구조부터 지적했다. “전공의를 값싼 노동력으로 쓰는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교육 개선은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했다. 이 구조를 깨려면 전공의 인건비를 병원이 아닌 국가와 지자체가 부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캐나다는 전공의 인건비를 정부에서 지원하니 “전공의가 일을 많이 하는 게 중요하지 않다.” 반면 한국은 “교수들이 환자를 진료해서 병원 수익을 올리고 전공의와 간호사 등 구성원 월급을 줘야 한다.” 이 부담을 덜어주지 않으면 교수들이 전공의 수련 등 교육에 집중할 수 없다고 했다.
‘논문 실적’ 중심인 교수 업적 평가도 개선돼야 한다고 했다. “논문을 많은 쓰면 좋은 평가를 받은 시스템”을 개편해 교육·환자평가·슈퍼비전 성과를 동등하게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캐나다는 교육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교수에 대한 재정적 보상체계인 ‘스타이펀드(stipend)’가 있다. 또 연구비를 지원받기 위해 신청했지만 선정되지 않더라도 그 시간과 노력을 보상해주는 MBR(Merit-Based Reward) 시스템이 있다고 소개했다.
이 교수는 “한국은 교수 업적 평가가 너무 획일화돼 있다”며 “교수들이 교육에 적극 참여하도록 진료 수입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고 논문 위주가 아닌 교육의 중요성을 반영해 교수 업적 평가 시스템을 다양하게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한국 전공의 수련체계가 바뀌려면 “교수가 변해야 된다”고 했다. 한국 교수 사회가 “너무 경직돼 있다”고도 했다. 이 교수는 “시대적 흐름이기 때문에 교수들이 조금 더 양보하고 변화하는 수밖에 없다”며 “병원도 지원하고 정부도 같이 움직여야 하지만 무엇보다 스승인 교수들이 바뀌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해외 제도 제대로 연구해 한국형 해법 찾아야”
이 교수는 인터뷰 내내 캐나다 전공의 수련체계를 자세히 설명했지만 “캐나다 모델을 한국에 그대로 들여올 수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해외 제도를 단순히 모방하면 오히려 더 큰 왜곡을 불러 올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 교수는 “제도의 뿌리와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한국 상황에 맞게 변형해야 한다”며 “최소 1년 이상 현장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실제 병원 시스템과 맞는지 검증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제대로 된 조사와 이해 없이 해외 제도를 차용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며 “중요한 것은 한국 현실을 고려해 적용 가능한 요소를 선별하고, 한국 여건에 맞는 체제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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