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수의료 붕괴가 눈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최근에는 분만 가능한 병원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이미 산모가 갈 수 있는 분만 병원이 없는 지방 중소도시도 늘고 있다. 사법 리스크로 산부인과 전문의들이 분만을 포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신생아 뇌성마비로 분만 담당 산부인과 교수가 형사 기소되면서 의료계는 소아청소년과 지원 기피를 불러온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사망 사건을 떠올리고 있다.
의사들이 분만 현장을 떠나는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근무 강도, 낮은 수가, 불확실한 미래가 얽혀 있다. 그 중에서도 결정적인 원인으로 꼽히는 게 사법 리스크다. 분만 과정은 변수가 많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 예기치 못한 불상사로 의사는 법정에 서야 한다. 형사처벌 가능성과 과도한 배상 부담이 전가되면서 결국 분만을 포기하는 선택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2013년 706개소였던 분만 병원은 2023년 463개소로 34.4%(243개소) 줄었다. 지방은 상황이 심각하다. 행정안전부 자료에 따르면 올해 6월 기준 분만 가능한 의료기관이 단 한 곳도 없는 시·군·구는 30.8%에 달하는 77곳으로 나타났다. 지난 2020년 분만기관이 없던 지역은 60곳이었으나, 5년새 17개 지역에서 추가로 분만실이 사라졌다.
산부인과가 ‘기피과’가 되면서 신규 전문의 수도 2008년 177명에서 2023년 103명으로 감소했다. 산부인과 전공의를 채우지 못하는 경우도 늘었다. 2025년도 하반기 전공의 모집에서도 산부인과는 620명 모집에 48.2%인 299명만 채워졌다.
그럼에도 정부는 유명무실한 대책만 내놓고 있다. 수가 인상, 필수과 지원책 같은 구호만 쏟아낼 뿐 사법 리스크 완화라는 본질적인 문제는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의사 개인에게 모든 법적 책임을 떠넘기는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필수과 위기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예측 불가능한 의료사고까지 형사 처벌로 다루는 관행을 개선하고 국가가 일정 부분 위험을 분담하는 제도적 장치도 필요하다.
의료계는 오래전부터 “사법 리스크를 줄이지 않고는 필수의료를 살릴 수 없다”고 외쳐왔다. 그러나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산부인과 붕괴는 시작일 뿐이다. 소아청소년과, 외과, 응급의학과 등 다른 필수과도 같은 위험에 노출돼 있다. 지금 이 위기를 막지 못한다면 우리나라 의료체계 전반이 흔들리는 것은 시간문제다.
정부가 내놓는 필수의료 강화 대책은 많다. 하지만 사법 리스크 부담 완화라는 핵심 과제를 외면한다면 실효성은 없다. 의사들이 필수의료 현장을 떠나는 이유, 남지 않는 이유를 직시해야 한다. 의사들이 두려움 없이 분만실에 들어설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그것이 필수의료를 살리는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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