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법인 세승 한진 변호사
최근 필자가 실무에서 접한 ‘재소금지 원칙’에 관한 흥미로운 대법원 판결을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사건 경위는 이렇다. 의사 A씨가 운영하는 B병원에서 약사가 미리 조제해둔 약을 간호사가 추가 조제한 후 환자에게 투여한 사건이 있었다. 보건복지부는 이에 대해 해당 약제비 상당액이 부당청구됐다며 국민건강보험법에 따라 40일의 요양기관 업무정지 처분을 내렸다.
이후 A씨는 복지부를 상대로 업무정지 처분 취소를 구하는 소를 서울행정법원에 제기했으나 1심 법원은 이를 전부 기각했다. A씨는 포기하지 않고 서울고등법원에 항소했고, 항소심 절차 중 복지부는 A씨의 요청에 따라 업무정지 처분을 과징금 처분으로 직권 변경해주었다. 그러자 A씨는 즉각 대전지방법원에 과징금 처분 취소를 구하는 소를 제기했고 이전에 제기한 소는 취하했다.
새로 진행된 소송과 관련해 1심 법원은 본안 청구에 대해 이유가 없다고 보아 기각했으나, 2심 법원은 본안 판단 대신 소 자체가 재소금지 원칙에 위반돼 부적법하다고 보아 각하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전소와 후소의 당사자가 동일하고, 기초가 되는 위반 행위도 동일하지만, 업무정지 처분과 과징금 부과처분은 소송물이 다르다고 보았다. 나아가, 근거 법령과 효과도 다르며, 그렇기에 어느 한 처분이 적법하더라도, 나머지 처분이 위법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보아 재소금지 원칙 위반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민사소송법 제267조 제2항은 ‘본안에 대한 종국판결이 있은 뒤에 소를 취하한 사람은 같은 소를 제기하지 못한다’는 이른바 ‘재소금지 원칙’을 명문화하고 있다. 이는 장시간 공들인 법원의 판결이 무효화되고, 당사자가 농락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둔 것이다. 쉽게 설명하면, 당사자의 일종의 변심(變心)에 따른 소송 남용 행위를 제한하겠다는 것이다.
실무상 요양기관이 복지부의 업무정지 처분에 대해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과 함께 취소를 구하는 소를 제기하고, 1심 혹은 2심 패소 후 업무정지 처분을 과징금 처분으로 바꿔달라는 요청을 하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행정처분 과정에서 요양기관은 업무정지 처분과 과징금 처분을 선택할 수 있는데, 많은 요양기관들이 집행정지까지 염두에 두고 업무정지 처분을 선택하나 막상 감수하려니 과징금 처분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때 통상 복지부는 요양기관의 요청을 받아주더라도 해당 소를 취하할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본 건에서 복지부의 행정처분 변경과 A의 소 취하 경위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다만, 위 대법원 판결은 몇 가지 합리적인 이유에서 업무정지 처분에 대한 소와 과징금 처분에 대한 소는 재소금지 원칙 적용대상이 아니라고 보았다. 즉, 이 경우에 있어 요양기관의 변심은 법률적으로 허용된다는 것이다.
본안에 대한 판단(행정처분의 위법성 여부)은 별개이므로, 결과적으로 별 차이는 없을 수도 있으나 감당하기 힘든 행정처분에 대응하는 요양기관들이 전략적으로 참고할 수 있는 사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