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이스라엘

본지는 '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 여행'이라는 코너를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양기화 상근평가위원의 해외여행기를 싣는다. 양기화 위원은 그동안 ‘눈초의 블로그‘라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내와 함께 한 해외여행기를 실어왔다. 그곳의 느낌이 어떻더라는 신변잡기보다는 그곳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찾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터키, 발칸,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동유럽에 이어 이번에는 이스라엘-요르단을 찾았다. 이 여행기를 통해 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자.<편집자주>

글라스보트에서 내린 시각은 오후 3시였다. 일행은 아카바성이나 시내는 돌아보지 않고 바로 출발하여 사해고속도로를 타고 암만으로 향했다. 아카바를 빠져나가면 아라바 광야가 펼쳐진다. ‘건조지’ 혹은 ‘사막’을 의미하는 아라바 광야는 동쪽의 에돔산지와 서쪽의 네게브사막 사이에 있는 저지대를 말한다. 구약시대에는 갈릴리바다에서 요르단계곡을 따라 아카바만에 이르는 지역을 일렀지만, 지금은 사해의 남쪽에서 아카바까지를 말한다. 부근에 있는 이스라엘의 팀나 구리광산은 솔로몬시대에도 채광을 하던 곳이다.

성경이야기를 많이 해주는 우리 가이드는 아라바 광야에서 모압왕국과 이스라엘왕국이 전쟁을 벌였다고 했다. 열왕기 하편 3장의 기록에 따르면 모압왕국은 대대로 이스라엘왕국에 많은 양을 공물로 바쳐왔던 것인데, 악한 짓을 많이 하던 이스라엘왕국의 아합왕이 죽자 모압왕국의 메사왕은 공물바치기를 중단했다. 이에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유대왕국, 에돔왕국과 연합하여 카락성 공략에 나섰던 것이다. 하지만 개전 7일째가 되자 먹을 물이 없어 병사들이 죽을 지경이 되었다. 여호람왕은 선지지 엘리야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엘리야는 자신이 악기를 타는 동안 병사들로 하여금 마른 시내의 바닥을 파도록 하였더니 물이 솟아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연합군이 카락성을 포위한 가운데 메사왕은 성벽위에서 장남을 산채로 불에 태워 그들의 신 그모스에게 제물로 바쳐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 모습을 본 연합군은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고 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의 제물로 삼는 것을 하나님이 막은 이후로 산 사람을 희생 제물로 삼지 않게 된 이스라엘사람들로서는 경악할 일이었을 것이다.(1)

도로가 있는 노란색 건물 뒤편 언덕의 중간쯤에 동굴 주변의 유적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 보이고(위좌, 위우), 동굴 입구에는 비잔틴 시대에 세운 수도원의 터가 발견되어 발굴 및 복원이 진행되고 있다. (아래, Jordan Tourism Board에서 인용함)

한참을 가다가 가이드는 오른쪽으로 지나는 산을 가리키며 롯동굴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물론 버스에서 내리거나 서지도 않고 그저 지나치면서 말이다. 여행사 상품으로 하는 여행의 한계이다. 이 지역은 롯의 고장이라고 하는 고르 엣 사피(Ghor es Safi), 즉 사피지역이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이주해와 이 지역의 소돔성에 자리를 잡았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기 전까지는 애급 땅이나 여호와의 동산과 같았다고 할 정도로 풍요로웠다고 한다. 창세기에 따르면 소돔은 ‘둘러싸인 곳’이라는 의미이며, 고모라는 ‘깊다’ 혹은 ‘물이 많다’는 의미로 아라바 광야의 저지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런 곳을 조카 롯에게 양보하고 사막에서 유목생활을 하였다.

하느님이 유황불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킨 이유는 그들이 죄악이 극에 달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성서에 따르면 나그네를 환대하던 관습이 사라지고, 폭력적 강간이 횡행하였으며, 특히 남색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하지만 소돔(Sodom)이 남색이란 뜻의 소도미(Sodomy)에서 왔다는 것은 분명치 않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 가이드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죄, 과부와 어려운 사람을 돌보지 않고 자신만 챙긴 죄, 남색 등 도덕적이지 못한 삶 등 세 가지였다고 한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겠다는 하느님의 의지를 알게 된 아브라함이 의인 50명이 있다면 용서해주겠다는 약속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아냈는데, 그마저도 안심이 되지 않아 25명으로 낮추었다가 결국 10명까지 낮추었다. 하지만 의인은 그만큼도 없어 결국 멸망을 당하고 말았다. 홀로 의롭게 살던 롯은 천사의 경고에 따라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소돔을 떠나게 되었다. 두 딸의 정혼자는 롯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따라나서지 않아 화를 당하고 말았다. 롯 일가가 소돔을 떠나자마자 유황불의 비가 소돔이 쏟아졌고, 놀란 롯의 아내는 천사의 경고를 잊고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에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다.

소돔을 떠난 롯과 두 딸은 소알 땅이 내려다보이는 고르 엣 사피의 북동쪽 언덕에 있는 동굴에 머물렀다. 가이드가 소개한 ‘롯의 동굴(카하프 룻, Cave of Lot)이다. 하지만 소알지역 역시 소돔과 같은 죄악이 성행하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았다. 다만 롯의 두 딸은 소돔이나 소알 지역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던지 롯에게 포도주를 먹이고는 관계를 맺어 각각 아들을 얻었고, 그 후손이 각각 모압족과 암몬족이 되었다. 두 딸은 아내를 잃은 아버지로부터 자손이 이어지지 못할 것을 염려했다고는 하지만, 그녀들이 저지른 근친상간의 죄는 컸고, 결국 그 자손 역시 멸망하고 말았다.(2) 한편 1894년에 발견된 마다바의 성조지 성당 바닥의 모자이크 지도에 근거하여 롯의 동굴 주변을 발굴하였더니 비잔틴시대 (5 ~ 7 세기)에 세웠던 기독교 수도원의 터가 발견되어 복원이 진행되고 있다.(3)

도로가에 서있는 싯딤나무들은 생기를 잃어가는 모습이다.(좌), 이 지역의 싯딤나무는 학명으로 아카시아 니로티카이다.(우-Wikipedia에서 인용함)

롯이 살던 시절에는 풍요로운 곳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길가 풍경은 꽤나 황량하다. 우기가 시작되기 전이라서 인지도 모른다. 창밖으로 보이는 언덕에는 갈증으로 시들어가는 모습의 나무들이 서있다. 가이드 말로는 싯딤(Sittim) 나무라고 한다. 히브리어로는 “시팀(שטים)”인데 아카시아의 일종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보는 아카시아와는 달리 잎사귀가 아주 작고 가늘어 뾰족하게 생긴 것은 연간 강우량이 50mm 이하의 메마른 사막에 적응하기 위한 변화일 것이다. 싯딤나무는 가볍고 내구성이 강하며 벌레에 대한 저항력도 뛰어나서 썩지 않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이런 특성 때문에 싯딤(아카시아 나무)은 법궤를 비롯하여 향단, 번제단, 등 각종 성막의 기구들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되었고, 기둥이나 성소의 널판을 만들 때에도 사용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나무를 신성하게 여겨 일반 백성의 집을 짓거나 집에서 사용하는 기물을 만들 때는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반면 이집트사람들은 영생의 상징으로 돌-무화과나무로 만든 관에 미라를 넣고, 싯딤나무로 만든 관에 미라를 넣은 관을 넣어 보호하기도 했다.(4)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을 때 씌웠던 가시면류관도 싯딤나무로 만든 것이다. 한편 싯딤나무는 거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뿌리를 깊이 내리기 때문에 다른 나무의 섭생을 방해하므로 오히려 광야를 거칠게 만드는 것이 흠이다. 싯딤나무는 과거에 여러 종이 포함되었지만, 이제는 아카시아 니로티카(Acacia nilotica) 한 종류만을 의미한다. 주로 시나이반도와 이집트에 국한하여 분포한다. 2피트 길이의 두꺼운 줄기가 있고, 꼬인 가시가 많은 나뭇가지고 있어, 전체적으로는 우산모양을 한다.

소돔산에서 볼 수 있다는 소금기둥 (Wikipedia에서 인용함)

소돔성은 사유지라서 들어갈 수 없다고 하며, 고모라성으로 생각하는 장소 부근에는 유황온천과 폭포가 있어서 성서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의 증거라고 본다. 성서에서 극적으로 멸망을 기록하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찾기 위하여 발굴에 매달리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고고학 리뷰>의 편집자인 허셸 생크스는 신이 파괴한 고대도시의 위치를 찾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신학적 의문이라고 일축하고, ‘신학적인 의문은 과학적인 증거나 반례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을 쓴 사람은 신이 소돔을 파괴했다고 썼을 때는 어딘가를 염두에 두긴 했을 것’이라고 했다.(5) 한편 이스라엘의 마사다 남쪽 15km에 있는 엔 보케그(Ein Bogeg) 부근에 소금으로 이루어진 소돔산이 바로 그곳이라는 주장과, 사해 동쪽 요르단에 있는 바브 아드 드라(Baba dh Dhra)가 그곳이라는 주장이 있다.(6)

알 무지브 다리에서 본 와디 알 무지브 협곡의 입구

해가 서편으로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왼편으로 사해가 나타났다. 그리고 다리를 건넜는데, 와디 알 무지브(Wadi Al Mujib) 자연보호지역에서 흘러드는 아르논(Arnon)강이 사해로 들어가는 알 무지브(Al Mujib)다리다. 다리 왼쪽으로는 좁아 보이는 협곡이 있는데, 여기에서 시작하는 와디 무지브 트레킹코스는 요르단에서 최고의 장소로 왕이 직접 트레킹을 하면서 홍보에 나선 적도 있다고 했다. 알 무지브 다리를 경계로 암만과 모압이 나뉜다. 1987년 지정된 212 ㎢넓이의 와디 무지브 자연보호구역은 암만에서 90㎞정도 떨어진, 요르단계곡의 남쪽에 위치하며 사해의 동쪽 산악지대에 걸쳐있다. 북쪽과 남쪽으로는 캐락과 마다바산맥으로 이어지는 보호구역은 해발 900m에 달한다. 보호지역을 흘러내린 일곱 개의 개울이 모여 아르논강을 이룬다. 마지막 빙하시대 무렵 사해의 수위는 해수면 아래 180m로 오늘날보다 240m나 높았다. 따라서 협곡의 낮은 지역은 사해에 잠겨 만이 되었고, 아르논강을 따라 흘러들어온 퇴적물이 쌓여갔다. 2만 년 전에 기후조건이 바뀌면서 호수의 수위가 떨어지면서 퇴적층에 가로 막힌 강물이 침식작용을 일으켜 좁은 협곡을 만들어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협곡이 더 깊게 깎여나가면서 지금의 와디 무지브 협곡이 만들어진 것이다.(7)

알 무지브 다리에서 잠깐 바라본 와디 무지브협곡의 초입의 모습도 만만치 않아보였는데, 협곡의 속살의 모습이 정말 궁금했다. 인터넷을 엄청 뒤져본 끝에 와디 무지브 트레일을 다녀온 분이 올린 협곡의 아름다운 모습을 찾아낼 수 있었다. ‘넥타이나 존스’라는 닉네임을 쓰는 블로거가 “2011.7.15 요르단-사해(Dead Sea), 와디무집(Wadi Muzib), 함마마트 마인(Hammamat Ma'in)”이라는 글제목으로 올린 포스팅이다.(8) 참고자료에 적은 자료를 참고하기 바란다.

암만으로 향하는 가운데 사해 건너 산 너머로 해가 지고

암만에 있는 숙소로 가는 도중에 일행은 사해기념품점에 들어 특산품을 감상했다. 특별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없었던 모양이다. 사진이나 기록도 남기지 않은 것을 보니 말이다. 암만 숙소에 도착한 시간은 9시로 꽤 늦은 시간이었다. 아카바에서 암만까지 4시간반 정도가 소요된다고 하는데, 기념품점에서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음에도 시간이 많이 걸린 셈이다.

참고자료:

(1) 크리스찬해피투어. 길하렛셋인 십자군 성채 카락성.

(2) 크리스찬해피투어. [요르단 10편] 롯의 동굴.

(3) Jordan Tourism Board. Religion & Faith.

(4) 하은교회 자료실. 싯딤(Sittim, Acacia) 나무.

(5) 허핑턴포스트 2015년 12월 14일자 기사. 고고학자들이 성경속의 소돔을 발견했을까?

(6) 바이블 투어. [요르단] 소돔과 롯이 피한 소알.

(7) Wikipedia. Wadi Mujib.

(8) Necktiena Jones and Jigsaw puzzle 블로그. 2011.7.15 요르단-사해(Dead Sea), 와디무집(Wadi Muzib), 함마마트 마인(Hammamat 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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