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수호 전 대한의사협회장
먼저, 내 경험담. 가족 중에 거동이 매우 불편한 환자가 있어 2~3개월마다 한 번씩 가족관계 증명서와 신분증을 지참하고 대학병원에 간다. 대리처방을 받기 위해서다. 환자가 입원했던 대학병원에서 늘 똑같은 처방을 받고, 같은 약국에서 오래 기다린 다음 약을 받아온다. 이를 십 수 년째 반복하고 있다.
대리처방을 위해 병원에 가는 날은 병원과 약국을 오가느라 반나절이 날아간다. 이럴 때는 비대면 진료가 가능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했다. 어차피 환자는 대면하지 않으니 진료의 질 차이는 별로 없을 테고, 나는 반나절의 시간을 아낄 수 있을 테니까.
진료는 시진 촉진 청진 문진의 대면 진료가 원칙이다. 그래서 적지 않은 동료, 선후배님들이 비대면 진료에 대해 원칙적 반대 입장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제한적 비대면 진료에 동의한다는 입장을 밝혀 왔다. 재진에 한해, 거동 불편자나 벽오지 환자들에게는 꼭 필요하지 않을까, 더 나아가 안정적으로 관리 중인 만성질환자까지도 환자의 편의를 위해 제한적으로 허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왔다.
안전성만 담보된다면, 비대면 진료는 환자는 물론 거동 불편자를 모시고 병원과 약국을 왕래할 가족의 일상을 최대한 보호해주며 시간을 아껴줄 수 있다. 놀랄 만큼 급속도로 발전하는 바이오테크놀로지, lT 등과 접목된 의료기기의 눈부신 발달로 인해 안전성 문제는 점점 더 개선될 것이다. 미래의 의료에서는 비대면 진료가 ‘허용’을 넘어 훨씬 보편화될 가능성이 높다면, 차라리 의협이 주도적으로 환자의 안전을 담보하고 편의성을 제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정책을 리드하는 게 대한민국 최고 전문가단체의 책임 있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어제(17일) 당정 협의를 통해 밝혀진 비대면 진료의 원칙은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고 본다. 재진에 국한된 점 등은 다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료는 비대면으로 받되 약은 환자나 대리인이 직접 약국에 가서 받아야 한다”는 지점에서 당혹감을 느낀다. 의아한 정도가 아니라 기괴하다고 해야 할까.
거동이 불편한 경우는 예외라고 하지만, 약은 본인이나 가족이 직접 약국을 방문하여 받아야 한다는 복지부의 원칙 표명은 안전성이 담보된 진료에 한해 환자나 보호자에게 편의성을 제공하기 위해 비대면 진료를 허용한다는 비대면 진료의 본질 자체를 훼손하는 결정적인 패착이다.
진료는 비대면으로 하는데 약은 약국에 와서 직접 받으라는 것은 이런 상황과 같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수트를 고를 때, 자신의 얼굴 사진과 신체 사이즈를 입력한 다음, 메타버스 환경에서 여러 벌의 옷을 입어 보면서 어느 옷이 가장 잘 어울리는지 신중하게 고른 다음, 주문과 결제를 마칠 수 있지만, 정작 그 수트는 택배로 받지 못하고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오프라인 매장에 직접 가서 가져와야 하는 상황(이런 걸 기괴한 상황이라 할 수 있지 않나).
복지부는 답해야 한다. 진료는 비대면으로 해도 안전한데 전송된 처방지시서에 따라 조제된 의약품을 택배나 다른 방법으로 받는 건 도대체 왜, 어느 부분에서 위험한 것인가? 병의원에 직접 방문하여 진료 받을 시간이 없는 바쁜 직장인이, 직장에서 멀리 떨어진 병원 앞에 있는 약국까지 가서 약을 타 올 시간은 왜 충분한가?
복지부가 이에 대한 대답을 제대로 못한다면, 어제 복지부가 발표한 약국은 제외된 반쪽자리 비대면 진료 원칙은 그간 여러 보도에서 거론된 바와 같이, 여야 막론 약사 출신 국회의원들의 “비대면 진료에 대한 대면 복약지도 및 수령“이라는 이상한 요구를 수용한 결과라고 추론할 수밖에 없다.
최근 국회에서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국회의원 숫자 포함 비례대표의 비율 등에 대한 논의가 있다고 알고 있다. 논의의 한 축은 비례대표의 비율을 늘리자는 방향인 것 같은데 필자는 이 부분이 몹시 못마땅하다. 비례대표의 원래 취지는 각 직역의 전문성과 대표성을 갖춘 훌륭한 분을 국회로 모셔 그분의 전문성을 입법 과정에 활용하자는 거다.
그러나 역대 비례대표의 면면은 특정 면허나 자격증을 가졌다 뿐이지 그 직역의 동료들이 인정할 만한 전문성은 물론이고 대표성조차 없이, 단지 공천권자와의 친소관계나 충성심 경쟁의 결과일 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는 의료계 출신 전현직 비례대표에게도 해당된다.
어떻게든 다시 공천을 받아 온갖 특혜와 명예(?)가 따라오는 국회의원을 한 번 더 하기 위해 비례대표들이 기댈 가장 중요한 언덕은 본인이 속한 특정 직역의 단체일 것이다. 그래서 약사단체의 사주를 받은 여야 막론 약사 국회의원들의 거센 압박으로 인해 정부의 비대면 진료원칙이 약 배송은 빠진 기괴한 형태가 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정부와 약사 출신 국회의원들은 필자의 주장이 모함에 불과하다고, 터무니없는 헛소리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즉시 비대면 진료에 약 배송도 포함시키면 된다. 그래야 기괴함이 제거된 정상적인 모델이 된다. 그렇게 되면, 나는 모함한 것을 사과하고, 헛소리 한 것을 부끄러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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