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세브란스어린이병원 강훈철 원장
"공유형 넘어 독립형 어린이병원 준비하겠다"
'한시' 지원은 한계…'항시' 지원으로 보호해야
"'어린이병원 좀 그만 만들라'고 규제할 만큼 너도나도 어린이병원을 세우려 애쓰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어린이병원뿐만 아닙니다. 의사들이 앞다퉈 필수의료를 하는, 해야 할 이유가 생겨나는 사회를 꿈꿉니다."
아무도 어린이병원을 만들지 않으니 '우리가 세우자'고 교수들이 손들고 나선 병원, 세브란스어린이병원의 강훈철 원장이 하는 말이다. 세브란스어린이병원은 국내 사립대병원으로는 처음 문 연 어린이병원이다. "현대 한국 의학의 씨앗" 제중원에 뿌리를 두었다는 자부심과 기독교 정신이 밑거름됐다.
지난 9월 취임해 어린이병원장 임기를 시작한 강 원장은 최근 청년의사와 만난 자리에서 자주 '비전'을 입에 올렸다. 병원장으로서 운영 목표를 설명할 때도,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로서 전망을 논할 때도 "내게는 비전이 있다"고 했다. 현실이 "더 나빠질 것도 없다"고 해서 그대로 "외면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도리어 대학병원급 규모를 자랑하는 독립형 어린이병원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소아 진료에 관한 모든 기능을 제공하고자 한다. '필수 중의 필수'로 꼽히는 소아 전문 희귀·중증·난치 질환 센터도 꾸준히 키워나갈 계획이다. 이런 방식으로 소아 진료를 절대 포기하지 말자고 목소리 높이려 한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여전히 노력하고" 있으니 이제라도 사회가 함께 해달라고 했다.
강 원장은 소아신경 분야 전문가로 어린이병원 신경과장과 하님정밀의료센터장을 거쳤다. 연세의료원 미래전략실 부실장과 연세의대 교무부학장으로 병원과 대학 운영에 관여해 왔다. 희귀유전성 소아뇌신경질환 권위자다.
- 소아신경과 전문의로 희귀질환 앓는 환자를 돌보고 계세요. 소아청소년과 전문의가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우선은 내가 아이를 좋아해요. 우리 집안에 소아과 의사가 많습니다. 아버지는 당시 피부비뇨기과 전문의셨지만요. 의대 실습 돌 때 일도 있네요. 80년대라 아직 군대식 문화가 강했습니다. 시대상이 그랬죠. 그런데 소아과는 병동 분위기가 참 부드럽더라고요. 아이들이 있으니까요. '아, 여기서 아이들을 돌보며 지내면 좋겠구나' 생각했습니다.
- 소아과를 지망한다니 아버지 반응은 어떠셨나요.
저를 쳐다보시더니 '너 소아과 가면 돈은 못 벌 거다' 하시더라고요. 그래도 제가 하고 싶다니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여태 기억나요. '소아과 좋은 점이 딱 하나 있다. 여기서 더 나빠질 게 없다. 더 실망할 일도 없다. 그러니 네 마음대로 해라.'
- 최근 소아청소년과 상황을 보면 '더 나빠질 게 없다'는 예상은 빗나간 셈인데요.
더 나빠지는 것을 넘어 문 닫는 거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죠. 국립대병원 어린이병원 대부분 수십에서 수백억원대 적자를 버텨내고 있습니다. 사립대병원은 애초에 어린이병원을 짓지도 않지만 지어도 문을 닫아야죠.
버티지 못하면 사명감이 없다 하고 돈만 좇는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사명감은 직업인이라면 누구나 기본으로 지니는 감정입니다. 특별히 의사에게만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또 돈을 많이 버느냐가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존경받느냐도 중요합니다. 소위 '폼이 나느냐'지요. 그리고 전문가로서 자기 발전을 할 수 있느냐, 이 세 가지가 충족돼야 그 분야가 지속됩니다. 소아 진료는 지금 이 세 가지가 충족되지 않습니다.
'한시 지원'이 아닌 '항시 지원'으로 소아 진료 지켜야
- 사립 의료기관은 위기를 더 크게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사명감과 자부심 외에도 그간 세브란스어린이병원이 버틸 수 있던 비결은?
'공유형' 어린이병원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소아과처럼 필수의료 분야는 진료할수록 적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선배들은 환자를 열심히 보면 어떻게든 수익이 나는 진료과를 어린이병원에 모아두기로 했습니다. 대신 안과나 이비인후과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소아심장과나 소아혈액종양학과도 안 만들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모델일 겁니다. 병원을 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오래 운영하기 위해 낸 묘책이었죠. 그 덕에 세브란스어린이병원은 사실상 유일한 흑자 어린이병원이 됐습니다. 그나마도 의정 갈등으로 전공의가 병원을 떠나면서 어려운 상황입니다.
- 정부는 필수의료 살리기를 내걸고 여러가지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최근 어린이공공전문진료센터 사후보상 시범사업도 도입됐습니다. 실제 현장이 느끼기에는 어떤가요.
세브란스어린이병원도 공공전문진료센터로 지정돼 국가 지원을 약속받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역부족입니다. 사후보상 시범사업도 사립 의료기관 특성을 고려하지 않다보니 병원이 예상한 지원 규모와 정부 측이 계산한 보상 간 차이가 상당해서 줄이기 힘들었습니다. 이번에 다행히 약 30억원 규모 지원이 확정됐습니다만 보완이 필요합니다. 국립대병원은 물론 사립대병원도 치우침 없이 적절한 투자와 지원을 받아야 합니다. 'N조 단위 투자', '긴급 지원'은 말하기 쉽지만 실제 이루기 어렵고 효과를 보장하지도 않습니다. 겨우 고비를 넘기는 '한시 지원'이 아니라 장기적 안목을 갖추고 소아 진료 분야를 보호하고 육성하는 '항시 지원'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비전'은 독립형 세브란스어린이병원 건립
- 임기 중에 공유형을 넘어 '독립형' 병원 건립 사업을 시작하고 싶다고 하셨어요.
저의 비전이자 꿈입니다. 세브란스병원에 독립형 어린이병원은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 할 수 있습니다만 결코 허황된 일이 아닙니다. 국가마다 부속 병원 개념에 차이가 있습니다만 미국은 하버드나 존스홉킨스처럼 유수 대학병원의 어린이병원 규모가 우리나라 웬만한 대학병원급입니다. 중국이나 일본도 마찬가지고요. 우리도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준비 과정으로 소아 진료 질을 높이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병원 내 소통과 협력을 강화해 의료진 역량도 키워나갈 계획입니다.
- 건립 준비로 기부 활성화도 꼽았는데 이렇게 큰 사업이 기부금으로 충족될까요?
생각보다 병원 기부 문화가 많이 발달했습니다. 보통 연고지나 종교 외에 기부를 결심하게 되는 곳이 바로 병원입니다. 그리고 병원보다 더 기부하고자 하는 마음이 모이는 지점이 바로 '어린이'입니다. 안타깝게도 세브란스어린이병원은 그간 본원에 비해 기부가 많이 활성화되지 못했어요. 기부해야 할 '무언가'가 없었습니다. 이제 독립형 어린이병원이라는 비전이자 목표를 품고 나아가려고 합니다.
- 그래도 기부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제도가 뒷받침하지 않으면 힘들어요. 하지만 이제는 모두 압니다. 필수의료 그 중에서도 소아 진료는 이대로 놔둬선 안 된다고 환자와 의료진은 물론 언론과 정부와 국민 모두 공히 동의하는 바입니다. 제도는 국민의 가치관으로 빚어집니다. 어려운 때를 잠시 넘기는 수준으로는 안 된다, 이제 꾸준히 투자하고 보호하고 키워야한다는 생각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의정 갈등으로 어려운 형국이지만 도리어 그 때문에 민심이 소아 진료를 지켜야 한다는 방향으로 간 셈이기도 합니다. 그럼 먼저 움직이고 준비해야죠. 기회는 옵니다.
- 독립형 어린이병원 건립 준비 외 중점을 둘 활동을 꼽는다면.
원장으로서 원내 분위기 환기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비단 우리 병원뿐만 아닙니다만 지금 필수의료하는 모든 이들이 패배감에 아파하고 있어요. 그래서 원내 행사를 다양하게 개최하려고 합니다. 구성원이 교류할 기회를 계속 가지려고요. 하다못해 바람이라도 같이 쐬자는 거지요.
언론과 접촉도 늘릴 생각입니다. 우리가 아직 여기 있다고 알려야지요. 우리는 계속 시도하고 있다고, 우리를 잊지 말아 달라고요. 우리에게는 비전이 있습니다. 소아 진료는 망해버려서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곳이 절대 아니에요. 설령 더는 어찌할 도리가 없더라도 부디 관심을 거두지 말길 부탁드립니다.
독립형 어린이병원 윤곽이 잡히고 병원 경영이 더 안정되면 재택의료를 포함해 병원이 환자를 '찾아가는' 서비스도 제대로 해보고 싶습니다. 병원 등록 환자 대상으로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시기별로 건강 유의사항을 알려주고 예방하고 치료 과정을 미리 대비하는 서비스를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중증 환자는 물론 상대적으로 경증인 환자도 이런 찾아가는 서비스가 점점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 지난 5월 어린이병원에 '하님정밀의료클리닉'도 문을 열었습니다.
소아 진료가 필수의료의 핵심이라면 희귀유전성 질환은 소아 진료 내 필수의료의 핵심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어린이병원에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서 애쓰던 차에 하님 주식회사의 전영한 회장과 의기투합해 원내 작은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세브란스병원에서 유전성 질환을 다루는 의사는 다 모았습니다. 진단만 하는 게 아니라 치료까지 연계합니다. 필요한 전 분야로 이어진다는 게 세브란스병원의 장점입니다. 재활병원도 있고요. 사례를 모아 연구를 하고 논문도 낼 수 있습니다. '폼 나는' 일을 하는 거죠. 고맙게도 기부도 계속 들어오고 있어요.
희귀질환은 진단은 해도 대부분 치료할 방법이 없습니다. 폐렴에 걸려도 더 신경써야 합니다. 반면 수익 내기는 어려워요. 어려운 질환이라고 무작정 안 하는 게 아닙니다. 중증 질환이라도 수익이 나면 병원으로서는 어떻게든 해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돈은 돈대로 안 되고 손만 많이 가니 힘든 거죠. 자칫하면 분쟁이 생기고 소송으로 번지고요.
소아과가 무너지면 결국 다른 의료 분야도 무너집니다
- 소아 진료가 회복할 수 있을까요.
네, 저는 그럴 거라 믿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번에 우리 사회가 깨달은 게 있어요. 모든 게 엮여 있다고요. 필수의료인 소아과가 무너지면 다른 과도 무너진다는 사실 말입니다. 의료가 무너지면 정부도 국민의 일상도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이 깨달음이 '한시 지원'으로는 안 된다는 목소리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한시 지원이 '항시 지원'으로 거듭날 때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동료와 후배들에게 한 마디.
늘 도전과 희생을 요구하는 게 소아 진료입니다. 그만큼 보람차지요. 하루하루 힘든 순간이 찾아오지만 그 노력이 얼마나 값진 일인지 잊지 않길 바랍니다. 소아 진료는 필수의료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소아 진료 살리기는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저는 소아 진료가 분명 살아나리라 믿습니다. 그날까지 우리 함께 어린이 환자를 위한 더 나은 의료 서비스를 만들어 갑시다.
- '더 나빠질 것도 없는' 지금, 다시 의대로 돌아가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래도 또 소아과 의사 하지요. 아버지는 말리겠지만(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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