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윤리학회가 〈2024 의정사태: 전개와 성찰〉 펴낸 이유
조성준 윤리위원장 “70년간 땜질해온 의료정책의 모순 폭발”
“의협, 협상 능력 갖춰야…의사는 환자·시민 편에 서야 한다”
1년 5개월 동안 의대생과 전공의들이 교육 현장을 떠나 있었다. 의대 증원 정책이 불러온 의정 갈등은 한국 의료를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어야 한다는 데 모두가 동의한다. 한국의료윤리학회가 의정사태숙의위원회를 구성하고 〈2024 의정사태: 전개와 성찰〉을 펴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두 번 다시 같은 사태가 반복돼선 안 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의대생과 전공의들은 다시 학교와 병원으로 돌아갔지만, 여기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의료윤리학회 윤리위원장인 조성준 강원의대 교수(심장혈관흉부외과)는 청년의사와 인터뷰에서 “의사가 쓰면 의사 편을 들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내부 비판에 방점을 찍었다”며 “의료계에 불편할 수 있는 내용도 객관적으로 담으려 했다”고 말했다. 내부 반성과 냉정한 비판을 기조로 정확한 진단과 처방을 내리고자 했다는 설명이다.
책 집필에는 의료윤리학회 소속 교수 9명이 참여했다. 조 교수 외에도 김준혁 연세치대 교수, 이일학 연세의대 교수, 이경도 울산의대 교수, 김도경 동아의대 교수, 최은경 경북의대 교수, 문재영 충남의대 교수, 박소연 인하의대 교수, 정유석 단국의대 교수가 함께 했다. 조 교수는 제1장 ‘2024 의정사태의 전개’, 제2장 중 ‘교육부 대응’과 ‘보건복지부 대응’, 그리고 부록 ‘의정사태 시간표’를 집필했다.
집필 과정에서 가장 공들인 부분은 ‘팩트 확인’이었다. 조 교수는 “당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언론 보도에도 오류가 많았다”며 “보건복지부·교육부 보도자료, 국회 속기록까지 대조했다”고 했다. 이어 “본문에 다 넣으면 흐름이 끊기기 때문에 각주에 공들여 정리했다”며 “사실관계를 분명히 해야 객관적인 분석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역사적 아카이브’로서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2024 의정사태 특징 "의사소통 안 되는 최고 결정자"
그러나 사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는 집필진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의사 파업'의 정당성 문제가 대표적이다. 조 교수는 “의사가 근로자로서 파업할 수 있다는 견해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돼 있지만 윤리적 정당성을 두고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며 “합의가 쉽지 않아 수십 차례 회의를 거듭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집필진은 공식 회의만 30차례, 비공식 온라인 토론까지 포함하면 매주 의견을 교환했다. “각 챕터는 집필자의 의견이지만, 철저히 조율된 결과물이기도 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조 교수는 이번 사태의 특징을 “의사소통이 안 되는 최고 결정자”라고 지적했다. 정책을 추진한 당사자와 협의해 문제를 풀지 못하고 비상계엄과 탄핵 국면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정리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정부도 합의 과정을 재설계해야 한다”며 정책 결정 구조 전반이 성숙한 합의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젊은 의사 세대의 변화도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조 교수는 “이번 사태의 전면에는 전공의와 의대생이 섰다”며 “(이들은) 이전 세대와 달라서 의료 정의뿐만 아니라 경제적 보상과 불이익 문제도 중요하게 내세운다”고 분석했다. 워라밸을 중시하는 세대적 가치관이 확산됐고 “입시 경쟁 속에서 이미 탈진한 세대가 의대에 들어오고 있다”고 했다. 조 교수는 “기성세대가 이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의협, 협상 능력 갖추지 않으면 이번 같은 파국 반복"
조 교수는 대한의사협회의 구조적 한계도 사태 장기화의 요인으로 꼽았다. 그는 “현재 의협 구조로는 정부와 의미 있는 합의를 이끌어낼 수 없다”며 “가장 강경한 인물이 회장으로 선출되는 일이 반복되면서 합리적 협상이 불가능해졌다”고 말했다. 또 “합리적 목소리를 내면 집단에서 매장당하기도 한다”며 내부 토론 구조의 부재를 지적했다. 결국 “의협이 세대·성별·직역 균형을 이루고 협상 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이번과 같은 파국은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조 교수가 특히 우려한 것은 의사들의 사명감 약화다. 그는 “코로나19 팬데믹 때는 사명감으로 버텼지만, 불과 몇 년 만에 그 사명감이 무너졌다”며 “다음 팬데믹이 오면 같은 책임감을 발휘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의사가 환자와 시민의 편에 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 고수는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환자와 시민의 이익을 외면하면, 의사들은 영원히 국민에게서 외면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교수·전공의·개원의 모두가 환자 편에 서겠다는 공통의 신념을 가져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한국 의료는 더 큰 불신의 늪에 빠질 것”이라고 말했다.
〈2024 의정사태: 전개와 성찰〉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한국 의료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낸 기록이다. 조 교수는 “이번 사태는 특정 정부 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70년간 땜질해온 의료정책의 모순이 한꺼번에 폭발한 결과”라며 “누구도 쉽게 해법을 제시할 수 없지만, 최소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기록을 남기는 게 우리의 책임”이라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