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러지는 마취과 교수①] 개원가로, 해외로 점진 이동
빅5병원 소아심장 마취 분야 ‘에이스’ 교수 미국행
의정 갈등 이후 마취과 전문의 이동 두드러진 서울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마취통증의학과 교수들이 사라지고 있다. 1년 넘게 지속되는 의정 갈등이 대학병원 이탈의 도화선이 됐다. 수치로도 드러난다. 청년의사는 최근 1년간 마취과 전문의 의료기관 분포 현황 분석하고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 이들이 대학병원을 떠나는 이유를 2회에 걸쳐 정리했다.
의대 증원이 불러온 의정 갈등이 1년 넘게 지속되면서 의료 현장 곳곳이 조용히 무너지고 있다. 마취통증의학과 교수들이 1년 넘게 당직을 서며 간신히 지켜 오던 대학병원 수술실도 그런 곳 중 하나다. 교육과 연구보다 ‘진료’에만 매진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사명감마저 포기하게 만들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의정 갈등 속에서 쳇바퀴 돌 듯 수술실을 지켜야 하는 현실도 막막하기만 하다.
그래서일까. 대학병원에서 마취과 교수들이 사라지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을 뒤로한 채 해외로 이직을 준비하는 이들도 있다.
올해 초 빅5병원 중 한 곳인 대학병원 소아심장마취 분야 전문의가 해외 의료기관으로 이직했다. 이 소식은 마취과 교수들 사이에서도 충격이었다. 세계적으로 실력을 인정받아 의사 사회에서도 ‘에이스’로 통하던 A교수는 가족들과 함께 미국행(行)을 택했다. A교수가 떠난 자리는 한 동안 공석으로 남겨둬야 했다. 특수 마취 분야 중에서도 소아심장마취 전문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인력이 부족한 분야다.
A교수가 떠난 후 40~50대 마취과 교수들도 들썩이기 시작했다. A교수처럼 특수 마취 분야에서 근무하던 인력들의 동요는 더 크다.
서울 지역 대학병원 마취과 B교수는 “A교수가 미국으로 간 이후 해외 이직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들이 곳곳에서 들려온다”며 “A교수 말고도 다른 병원에서 소아마취를 담당하고 있는 50대 교수가 ‘지금이 아니면 여기(한국)에서 주저앉을 것 같다’며 해외 이직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을 떠나려는 이유는 의료 환경이 너무 열악해서다”라고 말했다.
A교수는 “우리나라 의사의 실력은 해외에서도 최고로 인정해주니 (해외 의료기관 취업을) 도전해볼만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의정 갈등 전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우리나라 의료 현실이 암담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젊은 의사들은 그 마음이 더 할 거다. 이게 대한민국 마취과의 현실”이라고 했다.
지방은 서울보다 더 열악하다. 최근에는 대구 한 대학병원에서 ‘심장마취’ 할 마취과 교수가 없어 대구 전 지역을 뒤져 전문의를 수소문해야 했던 일도 있었다.
경기도 대학병원 마취과 C교수는 “의사 후배의 80대 어머니가 대퇴골 골절로 급히 수술을 받아야 했다. 어렵게 마취과 전문의를 수소문해 병원으로 보내 수술할 수 있었다. 대퇴골 골절에 심장기능도 안 좋아 심장마취를 해야 했지만 심장마취를 할 수 있는 인력이 없었던 것”이라며 “서전(surgeon)이 있어도 심장마취를 할 수 있는 의사가 없으니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의정 갈등 이후, 마취과 전문의 분포 지도 가장 많이 바뀐 ‘서울’
대학병원 수술실을 떠나 개원하는 마취과 전문의도 늘고 있다. 청년의사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지역·종별 마취과 전문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 의정 갈등 전후 상급종합병원 마취과 전문의는 줄어든 반면 종합병원과 병원, 의원 소속 마취과 전문의는 늘었다. 그 중에서도 의원 소속 마취과 전문의가 가장 많이 증가했다.
종별 의료기관 인력 현황을 살펴보면, 상급종합병원 마취과 전문의는 지난 2023년 4분기 803명에서 2024년 4분기 798명으로 5명 감소했다. 그러나 같은 기간 종합병원은 1,035명에서 1,064명으로 29명이 늘었고, 병원은 792명에서 794명으로 2명 증가했다. 그 사이 의원 소속 마취과 전문의는 2,474명에서 2,555명으로 81명이 증가했다.
마취과 전문의 이동이 가장 많은 지역은 서울과 경기 등 수도권이었다. 서울 지역 상급종합병원 마취과 전문의는 2023년 4분기 432명에서 2024년 4분기 413명으로 19명 감소했다. 강원과 광주는 각각 4명씩 줄어 지역 상급종합병원에 남은 마취과 전문의가 각각 19명과 18명뿐이다. 대구는 51명에서 3명이 줄어 48명 남았고, 경남은 36명에서 4명이 줄어 32명 있다. 반면 경기와 부산 지역 상급종합병원은 각각 15명과 9명이 늘어 110명과 37명이 됐다.
상급종합병원 마취과 전문의 인력이 감소한 지역들은 종합병원 인력이 소폭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지역 종합병원 마취과 전문의 수는 지난 2023년 4분기 197명에서 2024년 4분기 213명으로 16명 증가했다. 강원과 광주도 각각 3명씩 늘어 2024년 4분기 33명과 42명이었다. 대구도 3명이 늘어 37명으로 집계됐다. 경기와 부산은 각각 5명, 6명이 줄어 284명과 85명으로 확인됐다.
병원 소속 마취과 전문의 수는 전체로 봤을 때는 큰 변화가 없지만 서울 지역은 2023년 4분기 178명에서 2024년 4분기 161명으로 17명 감소했다. 부산과 대구도 각각 5명, 2명이 빠져 67명, 64명이 병원에 남아 있다. 반대로 경기는 7명이 늘어 167명이 됐고, 전남은 6명이 늘어 49명이 됐다.
개원을 택한 마취과 전문의는 서울 지역에 몰렸다. 2024년 4분기 서울 소재 의원에서 근무하는 마취과 전문의는 762명으로 전년도보다 40명 늘었다. 경기 지역 의원에서 근무하는 마취과 전문의는 전년도보다 15명 늘어 583명이다. 지난 1년간 의원 소속 마취과 전문의는 81명 늘었으며 이 중 68%가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늘었다.
의정 갈등 전후 '마취통증의학과의원' 개설도 크게 늘었다. 심평원이 공개한 ‘의원 표시과목별 요양기관 개·폐업 현황’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23년 개업한 마취과 의원은 75곳이지만 2024년에는 96곳이 새로 개업했다.
B교수는 “지방 사립대병원 마취과 교수들의 사직 소식이 많이 들린다. 사직한 교수들이 인근 국립대병원이나 준종합병원으로 주로 이동한다. 지금도 교육이나 연구는 거의 못하고 진료만 보는데 중증환자들은 더 많이 몰리니 소위 조건이 더 좋은 곳으로 이동이 늘고 있다”며 “그렇다보니 상급병원은 마취과 전문의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 상급종합병원에 생긴 공석이 지방에서 올라간 이들로 채워지고 있다”며 “전문의 취득하고 40~50대 젊은 교수들은 자녀 교육 등을 이유로 많이 이동한다. 지역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력들인데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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