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덕선 고려의대 명예교수
의대 정원과 신설 문제가 다시금 뜨거운 감자가 됐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오래되고 진부한 주제가 다시 수면 위로 부상했다. 정치권이나 정부는 유난히 우리나라 의사 수에 대한 OECD 평균을 앞세우며 최소 1,000명 이상의 의사 증원을 언급하고 있다.
미국과 캐나다, 영국, 프랑스 등은 지난 10여년 의대를 신설하고 정원을 늘렸다. 미국은 오바마 케어로 의료 보장성의 혜택을 받지 못하던 인구 5000만명에 해당되는 집단이 새로이 의료의 수혜자로 등장하면서 정원 증가 논란 여지가 없었다. 미국의 5000만명을 위한 신규 의사 규모는 우리나라 전체 인구를 감안하면 우리나라 활동 의사 수인 10만명쯤 증원해야 할 지경이다.
현재 늘어나고 있는 의사 수에도 미국에서 의사 주치의를 만나려면 한 달 가량 대기기간이 존재한다. 차선의 방책으로 의사 조수(Physician Assistant) 간호사(Nurse Practitioner) 등에게 처방권을 부여해 일차 진료의 부담을 나누게 했다. 비록 없는 것보다 나은 제도이기는 하나 이런 정책도 근본적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미국 의사회는 이들 보조 의료인력에 의한 의료가 의사보다 많은 진단 검사를 만들어 내고 있다고 경계한다. 일반 대중은 이들이 의사인지 아니면 보조인력인지도 잘 모른다고 한다. 캐나다는 개방적 이민 정책으로 인구 4000만명을 돌파했고 의대 신설에도 부족한 의사는 외국 의대 출신 의사 유입으로 충당하고 있다.
미국이나 영국에서 의사 증원 논의는 의료계와 의과대학협회가 주도하고 있으며 정부나 정치권과의 마찰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의사 증원 논의에서 OECD 평균 미달이라는 기준치를 내세워 의사를 증원해야 한다는 주장도 없다. 인구 1,000명당 의사 수 OECD 평균이 의사 인력에 대한 정답도 아니고 그 보다는 거대한 규모의 의료 대상 인구 집단군의 등장이나 인구 증가, 대기시간 증가, 그리고 주치의를 구할 수 없는 주민 증가 현상 등 구체적 근거를 댄다.
영국은 주치의가 의료의 근간이고 국민 모두 자신의 주치의를 갖고 있어야 한다. 한 주치의에게 배정되는 인구는 최대 2,000명이다. 그러나 이를 초과하는 주치의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주치의를 구할 수 없는 사람도 생겨났다. 주치의가 더 이상 신환 등록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영국의 명확한 의료제도와 인력관리 체계가 의사 추계에 대한 예측과 증원에 대한 타당성을 제시할 수 있는 장점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증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치의 면담 대기시간은 1주일 정도 소요된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환자 임의로 전문의를 만날 수 없다. 영국은 현재 연간 7500명의 의사를 배출하나 추후 14만5,000명 가까이 배출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럼에도 선뜻 그만큼 증원하지 못하는 이유는 의대생 한 명당 최소 3억원의 공적 교육비 예산이 추가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사 수를 늘려도 시간제 근무 선호와 잘 된 연금제도와 이주, 이직 등이 증원의 효과를 상쇄시키고 있다.
영국 역시 OECD 평균 미달이 의사 증원 이유는 아니다. 자신들이 구축한 의료제도의 운영에 필요한 명확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도 의사 증원을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프랑스 인구 500만명이 저마다 찾아갈 주치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의료사막화(Medical Desert)라고 명명했고 프랑스 정치권의 큰 부담이 되고 있다. 늘어난 정원에도 의료사막화 현상은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프랑스는 공공병원의 위기 현상을 보이며 의사들의 불만이 고조돼 만성적인 파업 현상도 보인다. 파업을 한다고 해서 우리나라 같이 업무개시 행정명령이나 형사고소, 구속 위협은 없다. ‘OECD 국가 평균’에 전공의가 파업을 했다고 유신 시대의 긴급조치와 같은 업무개시 행정명령을 내리는 나라는 없다. 노동 권리는 평균 이하가 아닌 세계 최하위 집단에 속하는데도 사회는 별 말이 없다. 노동권에 대한 OECD평균은 어디 갔는가.
최근에는 의사 소득 증가 OECD 1위라는 이유를 내세워 의사를 증원해야 한다는 새로운 주장도 등장했다. 많은 의사 인력을 늘린 선진국도 의사 소득이 여전히 높고, 높다는 이유로 소득을 낮추거나 의사를 늘려야 한다는 희한한 발상을 하지 않는다. 의사 소득 최고 상위권의 나라들은 모두 소득을 낮추기 위해 의사 증원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들린다. 다른 직종이나 자영업자는 어떤 상황인지도 궁금하다. 이 참에 국민소득증가율이나 다른 경제 지표도 아예 OECD 평균으로 맞추어야 할 모양이다. 세계 최고인 수진율도 평균으로 낮출 필요가 있다.
의사 증원 근거로 정부가 제시할 일은 구체적으로 얼마나 많은 지역에 의사가 없는지, 어떤 의사 인력이 부족한지 진정한 수요를 우리나라의 의료제도와 함께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제도가 무엇이 잘못되어 인구 10만명당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14명을 배출하고도 소아 입원이 안되거나 소아 진료 대기가 길어지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냉철히 조사하고 분석해야 한다. 인구 10만명당 소청과 전문의 14명은 OECD 평균을 훨씬 상회하는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인데도 마치 홍수 끝에 마실 물이 없는 꼴이 된 셈이다. 이런 논리라면 의사 수를 OECD 평균치보다 훨씬 상회하는 인력을 배출시켜도 여전히 필수의료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지속 불가능한 상태로 붕괴하는 것을 지켜보거나 그때 그때 임시 방편 정책 이외는 근본적 해결을 못할 것 같다. 국가경제는 저성장 시대로 가는데 의사 증원이 그에 부합하는 정책 인지도 의문이다.
의사 인력이 부족하다는 주장에 앞서 가장 중요한 사안은 정부, 사회, 그리고 전문직이 바라보는 바람직한 의료는 어떤 형태인지 거대담론에 대한 논의와 합의가 우선이다. 국가가 사회 그리고 의료계가 합의하는 우리나라에 잘 맞는 의료 형태를 규명하고 장기 실천계획을 세우고 이에 따른 진정한 의료 수요와 필요 인력 산정을 해야 중 ·장기적으로 타당성 있는 의사 증원 책정이 될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법으로 정해진 보건의료기본법에 의한 매 5년 단위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있다. 법안이 제정된 지 20여년이 지났는데도 5개년 단위의 기본 의료계획서를 한번도 제출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구조적 무능도 문제이지만 값싸고 빠른 전문의 위주 진료라는 모순적인 의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기형적 제반 문제를 임시방편으로 졸속으로 해결하려고 하니 어디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쉽게 답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대형병원의 의료 쏠림 현상으로 인한 의사 구인난은 진정한 의료 공급과 수요의 판단을 어렵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국민들이 가치 기반에 의한 선택으로 서울 대형병원으로 몰려드는 현상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 설득력 있는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인력증원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 하려면 문제는 더욱 복잡하다. 지역 의사도 필요하지만 지역 환자가 필요하다. 의사 증원에 앞서 의료전달체계 수립을 위해서는 환자에 의한 의료기관 자유 선택과 의료 소비 억제와 통제가 필요한데 정치적으로 표심을 잃을 수 있는 내용은 의사 증원에 앞장서는 선동 구호에 묻혀있다. OECD 평균이 우리나라의 의료 이데올로기라고 한다면 왜 의료 소비도 OECD평균으로 낮추어야 한다는 주장은 잘 들리지 않는가.
현재 의사 인력 증원과 의대 신설을 한 나라들이나 그리스와 같이 의사 인력이 OECD 평균치를 훨씬 상회하는 인구 1000명당 6.7명인 나라 모두 여전히 다수의 의료 공백 지역과 의사의 수도권 집중, 낮은 신뢰도의 공공의료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붕괴하는 필수 의료에 대한 대책도 미비한 채로 OECD 이데올로기에 의한 의사 증원이나 의대 신설은 정치권의 선거 공약으로 만들어진 빈 공항 시설과 같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의료인력 정책 수립에서 각종 통계자료에 근거한 양적 자료의 사용과 해석은 더욱 주의와 조심을 요한다. 그리고 자료의 진정성에 대한 비판적 사고에 의한 과학적 해석이 필요하다. 과학적 해석이 아닌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한 편파적인 해석과 사회적 혼란은 학자라면 스스로 경계해야할 함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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