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진단을 도와주는 새로운 소프트웨어나 인공지능(AI) 기술이 개발됐지만 한국의료 현장에서는 의료제도 한계로 활용이 어렵다는 지적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디지털병리 진단 시스템이다.

디지털병리는 디지털 스캐너를 이용해 병리학적 슬라이드를 디지털 이미지로 변환하고 그 이미지를 병리진단에 사용하는 것으로 국내에서도 지난 2019년 의료기기로 식품의약품안전처 승인을 받았다.

일부 대학병원은 디지털병리 진단 시스템을 도입했다. 디지털병리 도입으로 업무 효율이 향상되고 업무 시간이 절감되는 장점이 확인됐지만 더 확산되지는 못하고 있다. 정보를 공유할 시스템도, 수가체계도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한병리학회와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가 지난 19일 서울 강남 루닛 4층 강당에서 개최된 정책간담회에서는 국내 디지털병리 활성화를 위해서는 정부 차원에서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서울대병원 병리과 이경분 교수는 “면역조직화학 검사를 통한 단백질 검사, 유전자 검사가 암 진단과 정밀 의료에 필수 검사법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디지털병리는 장소와 시간에 제약 없이 접근 가능해 검사 시간을 단축할 수 있고 보관도 용이해 유리 슬라이드를 대치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우리나라처럼 기관 간 이동이 자유로운 의료 환경에서 디지털병리를 통한 자료 공유화는 환자의 이동 비용과 시간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라면서 “여러 기관이 함께 도입해 정보 공유 플랫폼이 갖춰진다면 환자 개인의 의료 정보 가치를 높여 암 치료와 관리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했다.

서울성모병원 병리과 정찬권 교수(병리학회 디지털병리연구회 대표)도 “디지털병리 도입을 위해 장비 설치, 병리검사실과의 원활한 전산시스템 연동, 병원 간 의료 데이터 활용을 위한 클라우드 구축도 필요하다”며 “하지만 국내는 적절한 보상 체계가 없어 디지털병리 시스템 도입이 어렵고 도입한 병원도 유지와 보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의료기관 내 디지털병리 도입을 확산하기 위해서는 별도 수가체계 마련이 필요하다고 했다. 현재 제한된 진단항목에서 계측병리를 수행했을 때 의료행위에 대한 수가가 발생하지만 이를 통한 수익만으로는 디지털병리 시스템 유지가 어렵다.

정 교수는 “디지털병리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며 “주요 병원들은 이미 도입을 시작했지만 초기 투자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인프라 확충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디지털 전환 자체에 대한 인센티브가 필요하다. 국가 차원에서 디지털병리를 도입했을 때 의료 수익이 발생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해주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국가 전체가 디지털화된다면 의료비용은 확실히 감소할 것”이라며 “의료기관에서 디지털병리 시스템 구축에 따른 비용을 회수할 수 있도록 추가 수가 설정이 된다면 병원들은 자연스럽게 디지털화를 추진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정 교수는 “대규모 인공지능 학습용 디지털병리 데이터 구축과 인공지능 기반 디지털병리 진단 의료기기 개발을 위한 국책 연구 과제들이 진행되고 있다”며 “이런 과제들을 통해 디지털병리가 확산되고 있지만 병원 입장에서는 디지털병리 유지를 위해 의료 수익이 발생해야 한다. 적절한 수가 체계가 마련되면 중소병원도 투자가 가능해질 것”이라고도 했다.

디지털병리 수가체계 등 제도적인 기반이 마련된다면 AI를 적용한 디지털병리 판독으로 효율성을 더 높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나왔다.

의료 AI 기업 '루닛(Lunit)' 팽경현 이사는 “AI를 적용한 디지털병리가 판독 효율성을 높이고 환자 예후 예측을 위한 새로운 바이오마커 발견에 기여할 수 있다”며 “디지털병리 기반 인공지능 개발에 대한 노력이 다방면으로 진행되고 있다. 디지털병리 수가체계 등 제도적으로 개선된다면 임상에서 적용이 가속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AI 기반 암 진단 기업 '딥바이오(deep bio) 곽태영 최고기술책임자(CTO)는 “우리 같은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는 디지털병리가 도입되지 않으면 쓰질 못한다”며 “디지털병리 업체 입장에서는 디지털병리가 도입되는 병원들이 많아져야 진단 결과를 토대로 치료 방향을 설계해야 하는 환자 입장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곽 CTO는 “디지털병리는 시스템 유지에 돈이 많이 드는 일이기 때문에 병원 입장에서는 도입하지 않아도 살만한데 왜 해야 하냐고 판단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디지털병리가 필요하다고 하는 이유는 환자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며 “소프트웨어 진단이나 치료 방향에 도움을 주는 AI 소프트웨어가 개발되고 있는 상황에서 장벽을 허물 수 있는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