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연 교수, 국내 도입의 의미와 전망 조명
"HER2 이후, 위암 표적 치료에 새로운 문이 열렸다"
위암 표적 치료의 지형이 바뀌고 있다. 오랜 기간 HER2 단독 타깃에 의존해왔던 전이성 위암 치료에 '클라우딘18.2(CLDN18.2)'라는 새로운 타깃이 떠오르며, 표적 치료의 수혜 대상이 크게 확장된 것이다.
이를 가능케 한 최초의 약물이 바로 '빌로이(성분명 졸베툭시맙)'다. HER2 음성 전이성 위암 환자를 위한 최초의 1차 표적 치료제로, 국내에서도 2024년 빠르게 허가된 후 실제 환자 치료에 적용되고 있다.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이지연 교수는 "빌로이의 등장은 단순한 약제의 출현을 넘어 치료 패러다임의 확장을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클라우딘18.2, '기전' 아닌 '발현'으로 승부 건 타깃
위암 치료의 역사에서 클라우딘18.2는 이례적인 타깃이다. 전통적인 항암제 개발은 종양 발생에 직접 관여하는 온코진(oncogene)을 겨냥해왔지만, 클라우딘18.2는 드라이버 유전자가 아닌 '종양 표면에 높은 비율로 발현되는 단백질'에 주목했다.
이지연 교수는 "기전 중심의 과거 방식과 달리, 발현율에 착안한 전략이 클라우딘18.2의 핵심"이라며 "이 전략의 성공으로 지금은 항체약물접합체(ADC), 이중특이항체, CAR-T까지 다양한 후속 치료제들이 개발 중"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위암 환자 중 클라우딘18.2 발현율은 약 30~40%에 이르며, 이는 HER2(10~~15%)나 MSI-high(4~5%)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치다. 덕분에 표적 치료가 가능한 환자 비율도 획기적으로 늘어났다. "전이성 위암이라는 어려운 암에서 새로운 옵션이 생겼다는 건 임상 현장에 큰 전환점"이라는 게 이 교수의 설명이다.
면역항암제와 양분된 치료 전략…클라우딘18.2가 '백본' 되는 구조
지금까지는 면역항암제(IO)가 위암 1차 치료의 핵심 옵션으로 자리잡아 왔다. 하지만 클라우딘18.2 발현 여부에 따라 새로운 전략이 가동된다. PD-L1 발현이 높을 경우 면역항암제 중심의 치료가 적용되지만, PD-L1이 낮고 클라우딘18.2가 양성이면 빌로이를 중심으로 한 치료가 표준이 된다.
"치료는 크게 두 갈래입니다. PD-L1이 높으면 화학항암요법(Chemo)+IO, 그렇지 않고 클라우딘18.2가 양성이면 Chemo+빌로이 조합이 됩니다. HER2 양성은 또 다른 트랙으로 구분되죠. 이제 진단 단계에서부터 환자들은 정밀한 프로파일링을 통해 치료 전략이 정해집니다."
대한위암학회도 이러한 흐름을 반영해 2025년 발표한 가이드라인에서 클라우딘18.2 양성, HER2 음성 환자의 1차 치료로 빌로이를 최고 수준으로 권고하고 있다.
단순 생존 연장 넘어 '수술 가능성'까지…치료 목표의 격상
위암 치료의 궁극적 목표는 '완치'지만, 특히 4기 진행성 위암에서는 현실적으로 생존기간 연장이 주요 과제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빌로이의 등장으로 이 같은 기조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다.
이지연 교수는 "단순히 수명을 늘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수술 불가능한 환자들이 다시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상태를 호전시키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4기 위암 치료의 새로운 전략"이라며 "CLDN18.2 발현이 확인된 환자 중 일부는 실제로 종양이 줄어들어 수술이 가능해지는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고 말했다.
"위는 해부학적으로 중요한 장기와 인접해 있어 종양이 커지면 수술이 어려워집니다. 좋은 약이 종양을 작게 만들어 수술을 가능하게 만든다면, 이건 단순한 생존 연장을 넘는 '게임 체인저'죠."
GLOW·SPOTLIGHT, 아시아 환자서 더 두드러진 효과
빌로이는 GLOW와 SPOTLIGHT라는 두 대규모 글로벌 3상 임상을 통해 승인됐다. 일각에서는 두 연구 간 세부 결과 차이에 대한 우려도 제기되지만, 아시아인 환자군에서 일관되게 높은 효과를 보였다는 점이 큰 의미를 가진다.
SPOTLIGHT 연구에서 아시아 환자군은 무진행생존기간(PFS) 중앙값이 13.96개월로 비아시아군(8.94개월)보다 길었으며, 전체생존기간(OS)도 23.33개월로 비아시아군(16.13개월)보다 높았다. GLOW 연구도 유사한 결과를 보이며 아시아 내, 특히 한국 환자에게 더 유의미한 약제임을 시사했다.
"우리나라의 병원 접근성과 진료 시스템이 매우 우수하기 때문에, 한국 환자에서 특히 긍정적인 데이터가 축적될 수 있을 것입니다. 빠른 진단, 협진 시스템, 조직 확보 모두 뛰어난 환경입니다."
'좋은 약 + 잘 설계된 임상 + 적절한 타깃팅'의 승리
이 교수는 "빌로이의 성공은 세 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중요한 건 세 가지입니다. 질병의 분자 병리학적 특성을 잘 이해하고, 그에 맞는 적절한 약이 개발되며, 임상시험이 효율적으로 진행되는 것, 이 삼박자가 맞아야 새로운 치료제가 환자에게 도달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신약이 등장하면 처음에는 보험 급여가 되지 않아 아쉬움이 있지만, 우선 빠른 허가를 통해 환자들이 약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어 "국내에는 위암 환자가 많기 때문에 비교적 다른 나라보다 빠르게 빌로이 허가가 났고, 지금은 약제비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환자들이 이 약을 쓰고 있다"며 "추후 데이터가 쌓이다 보면 조만간 건강보험 급여 적용이 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올해 6월부터는 Chemo+빌로이 병용 시, Chemo 부분은 건강보험이 적용돼 치료 접근성이 개선됐다.
암은 예고 없는 불청객…긍정적인 자세가 치료의 시작입니다
위암은 진단 시 환자와 가족 모두에게 극심한 충격을 안기는 질환이다. 특히 식생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만큼, 일상에 미치는 영향이 크고 젊은 여성 환자의 비율도 적지 않다. 이지연 교수는 이러한 현실에 깊은 공감을 표하며 환자들을 향한 격려의 메시지를 전했다.
"암은 인생에 예고 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입니다. 특히 위암은 아이를 둔 젊은 여성 환자도 많아 개인적으로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식사 자체가 어려워지는 병이기 때문에 환자와 가족 모두가 함께 힘들어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수는 위암 치료 환경이 빠르게 개선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강조했다.
"요즘 약들이 정말 좋아졌고, 신약 개발 속도도 굉장히 빠릅니다. 실제로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됐던 환자분이 좋은 약 덕분에 상태가 호전되어 수술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어 이 교수는 위암 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정기적인 건강검진과 조기 진단의 중요성도 함께 언급했다.
"가장 좋은 건 병이 생기기 전에 건강검진을 받고 식습관을 점검하는 것이죠. 하지만 병이 갑작스럽게 찾아오더라도, 부디 긍정적인 자세로 임하시길 바랍니다. 임상 현장에서는 환자들에게 더 나은 치료 옵션을 제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고, 실제로 많은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치료 방향을 빠르게 설정하고, CLDN18.2 같은 분자 표적을 확인해 적절한 치료에 들어간다면 충분히 호전될 수 있습니다. 희망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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