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이상의 본사 설득은 어려울 것 같아요. 향후 급여 신청 계획은 없습니다."
한 글로벌 제약사 관계자로부터 최근 기자가 들은 말이다. 전문의약품, 그것도 고가의 항암제가 한국에서 급여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곧 '시장'을 포기하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미국에서 최초 허가를 받은 지 4년이 지나서야 한국에 도입됐고, 국내에 들여오고도 4년이 다 되도록 비급여 항암제로 남아 있는 이 약제는, 소위 말하는 'First in Class' 의약품이다. 현재까지도 그 질환의 특정 환자군이 1차 치료에 쓸 수 있는 유일한 표적치료 옵션으로 가이드라인에 등재돼 있다. 말인 즉슨, 이 약이 개발된 지 8년이 다 되도록 국내 환자들에겐 그저 '그림의 떡'인 상황이며, 제약사가 급여를 포기한 이상 앞으로도 쭉 이 상황이 변하지 않을 것이란 거다.
이 약은 몇 차례의 도전 끝에 급여 첫 관문인 암질환심의위원회(암질심)를 넘어섰지만, 약제급여평가위원회(약평위) 경제성평가소위원회 단계에서 비용효과성 입증에 실패하며 급여 시도가 무산됐다. 수차례의 본사 설득 끝에 받아낸 약가로도 경평을 통과하지 못하자, 회사가 급기야 급여 포기를 결정한 것.
이 소식을 듣자마자 기자는 한국에서 급여를 포기한 몇몇 항암제들이 떠올랐다. FLT3 변이 양성 급성 골수성 백혈병(AML) 환자의 1차 치료에 사용되는 '라이답(성분명 미도스타우린)', gBRCA 변이 전이성 유방암 환자 치료에 사용되는 '탈제나(성분명 탈라조파립)' 등 정부가 요구하는 약가를 맞추기 위한 본사 설득에 실패하고 지금까지도 비급여로 남아 있는 항암제들 말이다.
라이답의 고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국내 환자들은 불가피하게 허가사항에도 없는 '소라페닙'으로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이 역시 허가초과 사용에 대한 개별 심사를 받은 후 사용해야 하기에 그마저도 자유롭지는 못하다.
탈제나의 경우, 환자들이 사용 가능한 동일 기전의 '린파자(성분명 올라파립)'가 있지만, 이 역시 유방암 적응증으로는 비급여인 상황이다. 현재 난소암 치료에만 보험급여가 적용되고 있는 린파자 역시 유방암, 전립선암, 췌장암 적응증에 대한 급여 확대 계획이 없어, PARP 억제제 치료가 필요한 국내 환자들이 온전히 그 경제적 부담을 짊어지고 있다.
린파자를 보유한 제약사의 입장도 일견 이해가 된다. 적응증별로 환자 수도 다르고, 약제가 가지는 암상적 가치도 다른데, 이를 반영해 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없으니 급여 기준이 확대될 때마다 기승전 '약가 인하'로만 귀결되는 상황에서 선뜻 나설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국내에서 린파자의 특허 만료가 얼마 남지 않아 무리한 약가 인하를 감안하고 급여 확대를 시도하기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 회사 측의 설명이다.
문제는 제약사들의 이 같은 움직임이 한국 시장의 경쟁력 저하를 넘어 국내 환자들의 치료 접근성 저하를 불러오는 '신호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글로벌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치료제들이 국내 시장에서만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일이 반복되면, 한국에 대한 본사의 관심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허가나 연구 개발에 대한 투자 대상에서 우선순위가 밀리게 되고, 이는 곧 국내 환자들의 치료 기회 박탈로 이어진다. 또한 한국이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하는 치료 수준을 유지하는 데 큰 장애물이 된다.
국내에서 신약의 급여 등재가 늦어지는 이유는 대부분 재정적인 부분에 기인한다. 제약사들은 자체적인 연구와 개발에 막대한 비용을 들였지만, 국내 약가 제도는 그들의 투자를 정당하게 보상해주지 못한다. 과도한 약가 인하 요구가 지속되면, 급기야는 제약사들이 한국 시장을 포기하게 되고, 이는 환자들에게 더 많은 고통과 부담을 안겨주며, 결국 한국의 경쟁력은 점차 약화될 것이다.
정부는 이러한 악순환을 막기 위한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신약의 급여 등재를 위한 보다 현실적인 평가 기준과 약가 책정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신약이 국내에 적시에 공급될 수 있도록 보다 다양한 급여 모델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환자들의 치료 접근성을 보장하고, 국내 제약 시장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