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發 가격 전쟁…신약 '위축', CMO '수혜' 전망도
"대미 협상·제약 외교에 재정비 필요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주요 글로벌 제약사 17곳에 약가 인하를 강하게 요구하며 60일 시한을 제시했다. 지난 7월 31일(현지시간) 백악관이 공개한 내용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소비자가 같은 약을 다른 나라보다 4~5배 비싸게 사는 일은 끝나야 한다"며, 자발적 가격 인하가 없을 경우 규제와 수입약 허용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고 경고했다.
이번 조치는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본격적으로 추진 중인 '최혜국 약가(Most-Favored-Nation)' 정책의 일환이다. 서한은 화이자, 머크(MSD), 존슨앤드존슨, 암젠, 사노피, 노바티스 등 미국·유럽의 주요 다국적 제약사 CEO들에게 일괄 발송됐으며,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SNS 계정에도 해당 내용을 공개했다.
당일 뉴욕증시에서는 제약바이오주가 일제히 하락세를 보였다. 제약사들은 즉각 반발하며 "글로벌 혁신 생태계를 위협하는 조치"라고 비판했지만, 미국제약협회(PhRMA)는 "다른 나라들이 약값을 제값에 지불하게 만드는 것이 정답"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또한 일부 기업은 "미국 환자의 접근성을 개선하기 위해 정부와 협력 중"이라고 유화적 태도를 보였다.
해당 사태는 미국을 넘어 전 세계, 특히 한국 제약산업 전반에 구조적 변화를 촉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기술수출 수익성 타격…바이오시밀러·CMO는 반사이익
한국 제약기업은 오랫동안 세계 최대 의약품 시장인 미국을 핵심 수출처로 삼아왔다. 미국의 약가가 낮아질 경우, 국내 기업이 기술수출을 통해 수익을 확보하는 전략은 타격이 불가피하다. 미국 시장에서 예상 수익이 줄어들면 다국적 제약사는 기술도입 계약에 보수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고, 기술료·마일스톤 규모도 축소될 수 있다. 한국의 R&D 기반 신약개발 기업들에게는 수익성 저하로 이어져, 신규 파이프라인 개발이 위축될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바이오시밀러 및 제네릭 분야는 트럼프의 약가 인하 기조에 따른 수혜가 기대된다. 고가 오리지널 의약품의 약가가 인하되면, 제네릭·바이오시밀러를 포함한 저가 대체재의 시장 접근성이 오히려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셀트리온' 등 국내 바이오시밀러 기업은 미국 시장에서의 점유율 확대 기회로 삼겠다는 입장이다.
의약품 위탁생산(CMO/CDMO) 부문도 유리하다. 미국 제약사들이 수익성 유지를 위해 제조비용 절감에 나설 경우, 상대적으로 고품질을 제공하면서도 단가 경쟁력이 높은 한국 CMO를 찾는 사례가 증가할 수 있다. 특히 미국이 중국 원료의약품 의존도를 줄이려는 상황에서, 한국은 그 대안 생산지로 더욱 유리할 수 있다.
韓 약가제도 압박 가능성
문제는 미국의 약가 인하 움직임이 단순 자국 내 정책을 넘어 국제 통상 이슈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만 바가지 쓰는 구조는 더는 용납하지 않겠다"고 발언하면서, 향후 FTA 협상 등에서 타국 약가정책을 문제 삼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실제로 미국은 한국, 유럽 등 복지국가들의 약가 규제 정책을 "미국 제약산업의 수익을 희생시키는 구조"라고 인식하고 있다.
이 같은 기류는 한국의 건강보험 약가 결정 방식에도 역풍으로 작용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다국적 제약사가 한국에 신약 출시를 주저하거나 지연하는 일명 '코리아 패싱(Korea passing)'으로 약가에 불만을 표시했다면, 앞으로는 미국 정부가 직접적으로 "자국 기업에 정당한 가격을 책정하라"는 방식으로 압박할 수도 있다.
또한 미국이 약가를 강제로 낮추면, 다국적 제약사는 손실을 메우기 위해 한국, 일본, 유럽 등 상대적으로 통제가 심한 국가들에 가격 인상 요구를 강화할 가능성도 있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의 신약 출시 가격이 높아지거나 도입 자체가 지연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실질적으로는 한국 환자들의 접근성이 저하되고, 건강보험 재정에도 부담이 커질 수 있다.
산업 전략과 보건 주권의 '투 트랙 대응' 필요
트럼프의 '약가 압박'은 한국의 통상외교 전략에도 구조적 대응을 요구할 수 있다. 향후 미국이 자국 신약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조건으로 FTA 협상에 나설 경우, 한국은 국내 재정과 환자 부담을 고려해 '보건 주권'과 '통상 압력' 사이에서 조율 전략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또 한국은 WHO, OECD 등 국제기구에서 약가 형평성 및 의약품 접근성에 관한 정책 논의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다자 협력 기반의 '약가 외교' 구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국내 산업계 역시 유럽, 중동, 중남미 등 목표 시장을 다변화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트럼프 대통령의 약가인하 압박은 글로벌 제약산업의 판도 변화를 예고하며 수익성 저하에 따른 제약사들의 사업 재조정, 국가 간 정책 갈등, 환자 접근성의 변화 등 다층적 파장이 예상된다.
한국 역시 산업적 측면에서는 가격경쟁력, 품질, 파트너십 역량을 바탕으로 기회를 선점하는 전략적 고민이 필요하고, 그와 동시에 국내 환자들의 치료 접근성과 국가 보건 주권을 지키기 위한 균형 잡힌 정책적 대응과 사회적 합의를 준비해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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