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원 연세의대 교수

“소는 누가 키우나?”

한때 유행한 코미디 프로그램 대사다. 한 아나운서가 정계 진출을 권하는 정치권의 러브콜에 돌려준 답이기도 하다. 때마다 회자되던 이 말을 이제 수련 현장에서 던져야겠다. 그래서, 소는 대체 누가 키우나.

연세의대 홍종원 교수(성형외과학교실)
연세의대 홍종원 교수(성형외과학교실)

지난해 졸속으로 추진된 의대 정원 증원 정책이 의료계를 뒤흔들었다. 소위 잘나가던 한국 의료가 창졸간에 뜯어고쳐 마땅한 개혁 대상으로 전락했다. 의대만 들여보내면 훌륭한 의사 배출은 보장된다는 얄팍한 믿음 아래 증원 정책은 '계엄령'처럼 덮쳐왔다. 이에 맞서 전공의는 사직하고 의대생은 휴학하고 교수들은 사직서를 제출했다.

핵심은 의대 정원 증원이었지만, 사직으로 맞선 전공의들의 행동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언론이 의료계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부정적이던 여론이 움직였다. 의료계가 꾸준히 외쳐온 이야기들이 비로소 수면 위로 올라왔다. 대체 언제 대선 후보들이 앞다퉈 의료 현안을 논한 적이 있던가. 전공의들의 항거가 분위기를 주도한 것이다. 이들을 북돋고자 정부와 의료계 대화 테이블에 교육·수련 환경 재정비가 오른 것은 당연한 순서다. 연차별 역량 강화 방안도 논의 중으로 안다. 의정 갈등을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 수많은 단체와 기관의 목소리가 실렸다. 그런데 정작 현장에서 실제 교육을 하는 지도전문의들은 소외되고 있다.

정책을 결정하는 쪽도, 제안하는 쪽도 그저 '필요하다'는 말뿐이다. 설득이 안 되니 수긍이 힘들다. 이해가 안 되니 참여하기 어렵다. 설명은 없고 온통 의무와 제한뿐이다. '이건 안 하면 안 된다, 저건 하면 안 된다.' 지도전문의들은 지금 일을 덜려고, 돈을 더 받으려는 것이 아니다. 눈앞에 늘어놓은 정책안이 정말 효과가 있을지 근본적인 질문의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전공의 교육은 단지 인력 양성 그 이상이다. 앞으로 어떤 의사로 살 것인가 결정하는 과정이며, 의학과 임상 현장의 미래를 키우는 일이다. 단순히 교육 이론 한 줄로, 현장을 고려하지 않는 형이상적 설계로 그 목표를 다할 수 없다. 그런데도 정책 결정자는 수련병원의 교육·수련 질은 등한시하고 '인력'을 어떻게 밀어 넣을지 골몰한다. 이번 의정 사태가 벌어지기 직전 있었던 수도권·비수도권 전공의 정원 비율 강제 조정도 똑같았다.

의료계 정책 제안자도 마찬가지다. 각종 교육 이론에 근거해 다양한 방법을 현장에 적용하자고 한다. 내용은 너무나 훌륭하다. 체계적으로 도입한다면 매우 좋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 지원도 예산도 확보되지 않고 병원 현장에 미칠 영향도 제대로 가늠 안 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현실성을 갖출 수 있겠는가. 아무리 지도전문의들이 답을 구해도 돌아오는 게 없다. 설득도 없다.

이왕 하려면 적어도 효과는 봐야 한다. 하지만 그간 의대 교육을 돌아보자. 지도전문의로서는 실효성에 의문만 든다. 폭풍같이 몰아친 PBL(Problem Based Learning) 도입 과정이 그랬고, 최소한의 술기는 익히자며 들인 OSCE 교육이 그랬다. 의대는 이미 교과서가 없어진 지 오래다. 졸업 포트폴리오를 보라. 정작 당사자가 상대한 민원인이나 원내 갈등 피해자를 생각하면 이질적이다 못해 민망할 따름이다. 이러니 누가 전공의 교육에 마음을 다할 수 있겠나. 대체 누가 신명 나게 소를 키우겠느냔 말이다.

이제는 전공의 교육까지 현실성 없는 이론으로 무장한 정책을 내세운다. 믿고 싶어도 믿기가 어렵다. 과연 '시뮬레이션'이 전공의 수련의 목표를 구현할 수 있을까? 사람을 대하는 태도, 의사로서 사명감, 동료를 존중하고 기꺼이 협력하는 자세까지 시뮬레이션으로 가르치려는 걸까? 이러다 '진짜 의사 되기' 프로그램이 나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정책의 가장 중요한 열쇠는 정책을 구현해 내는 실무자가 쥔다. 전공의 교육·수련에서는 지도전문의들이 바로 그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나 지금 지도전문의들은 논의에서 밀려난 채, 들리는 이야기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게 고작이다. 도제식 학습은 정말 터부시해야 할 정도로 나쁜 학습법인가. 전문가가 되려면 따라야 한다는 '1만 시간의 법칙'을 왜 수련 현장은 쪼개고 쪼개놓으려 하는가. 응급수술이나 중환자 진료로 24시간 연속 근무를 한 전공의는 다음 날 예정된 학회 발표를 불참해야 하나. 언제까지 교육 사대주의에 빠져 현장을 무시하는 교육기술자들의 정책을 우리가 따라줘야 하는가. 또한 입맛 따라 정책을 채택하거나 아예 외면하는 정책결정자들의 행태는 언제까지 지켜봐야 할까.

과거 전공의들이 말도 안 되게 높은 업무강도에 시달리며 비합리적인 수련을 받아야 했던 것은 맞다. 선배들이 조금씩 개선하면서 그 혜택을 내가 입었고, 나 또한 내가 겪기 싫었던 일들을 후배들에게 물려주지 않고자 노력하고 있다. 후배들 역시 업무 환경을 고쳐나가고 있다. 물론 아직 개선해야 할 부분은 있다. 그러나 더 나은 업무 환경을 만들자고 수련까지 느슨해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섬세하게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앞으로 어떤 결론을 맺든 지도전문의들은 성의를 다해 교육을 계속할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소외되고 답을 찾지 못한 채로 어찌 신명 나게 소를 키우고 슬기로운 전공의 생활을 꾸려갈 수 있을지 답답할 따름이다. 전공의 교육수련 정책이 옳은 방향으로 가리라 믿는다. 합리적이고 좋은 내용으로 채워나가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 정책은 현장에서 구현돼야 한다. 모쪼록 그 주체가 지도전문의라는 점을 상기하고 우리의 목소리도 진정성 있게 귀담아들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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