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암 치료는 지금③] 한국 혈액암 치료 현장의 민낯
"아나킨라 등 보조 약제의 부재, 치명적 치료 공백 초래"

이중특이항체 및 세포 치료제 등 최근 혈액암 분야에 혁신적인 신약들이 등장하면서 환자들의 생존율이 크게 개선되는 등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 하지만 고가의 약제비에 대한 부담, 제도적 여건 등 혈액암 치료 환경과 신약 도입 등은 국가마다 처해진 환경이 상이한 상황이다. 이에 본지는 지난달 초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진행된 세계 최대 혈액학 행사인 미국혈액학회 연례학술대회(이하 ASH 2024)에서 발표된 주요 신약 연구들을 살펴보고, 전문가들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한국과 미국의 혈액암 치료 환경을 비교 분석하는 특집 기사를 3회에 걸쳐 진행한다. 1편에서는 이중특이항체 신약을 중심으로 한 최신 혈액암 치료의 패러다임을 조명하고, 2편에서는 한국과 미국의 혈액암 치료 환경을 비교한다. 마지막 3편에서는 고가의 혁신 신약이 국내에서 제대로 활용되기 위해 우리가 갖춰야 할 요건들에 대한 제언을 담았다. [편집자주]

(좌측부터) 대한혈액학회 김석진 이사장, 윤덕현 연구지원이사, 김혜리 홍보이사
(좌측부터) 대한혈액학회 김석진 이사장, 윤덕현 연구지원이사, 김혜리 홍보이사

앞서 펜실베니아대학병원 혈액종양내과 스테판 슈스터(Stephen J. Schuster) 교수는 혁신 신약의 비용효과성을 바라보는 관점, 임상의의 치료 결정에 대한 공공 및 민간 보험의 인정 수준, 환자들의 치료 접근성 개선을 위한 국가 차원의 특례 제도 마련 등 사례를 통해 한국과 대비되는 미국의 혈액암 치료 환경을 조명했다(②편-한국과 대비되는 천조국의 혈액암 치료 환경).

이에 대해 국내 혈액암 전문가들은 한국은 급격히 발전하는 의학 기술에 발맞춘 보다 유연한 약물 승인 및 보험 정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대한혈액학회 김석진 이사장(성균관의대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은 의료 발전과 한국의 규제 간의 격차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에 우려를 표명했다.

김 이사장은 "현재의 규제 환경은 의학의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라며 "전세계적으로 획기적인 치료법이 등장하고 있지만, 우리의 제도는 이러한 혁신에 접근하는 데 종종 장벽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중특이항체 및 CAR-T 치료제에 대한 모호한 급여 심사 기준을 예로 들었다.

앞서 언급된 '킴리아' 대상 환자의 '치료 실패' 인정 기준과 더불어 최근 진행된 이중특이항체 '컬럼비(성분명 글로피타맙)'와 '엡킨리(성분명 엡코리타맙)'의 급여 심사에 이의를 제기한 것.

두 약제 모두 재발 불응성 미만성 거대 B세포 림프종(DLBCL) 3차 이상 치료에 식약처 허가를 받아 지난 12월 급여 첫 관문인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암질환심의위원회 심의 안건으로 올랐지만, 모두 고배를 마셨다.

컬럼비와 엡킨리의 임상적 타당성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암질심이 장기 데이터의 부재를 지적했다는 것인데, 윤덕현 연구지원이사는 이에 대해 "규제 당국은 계속해서 신약의 급여 심사에 장기 추적관찰 기간 데이터를 요구하지만, '장기'에 대한 명확한 정의도 제시하지 않는다"면서 근본적인 딜레마에 직면해 있음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렇다면 이러한 정의되지 않은 장기 데이터가 축적될 때까지, 새로운 치료법을 필요로 하는 환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실제 학회는 혈액암 치료제에 대한 급여 심사에 정부가 전체생존(OS) 데이터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혈액암 특성을 반영한 대리지표(PFS, MRD) 등 유연한 기준을 인정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윤덕현 연구지원이사는 이중특이항체 및 CAR-T 등 면역 치료에 수반되는 전후 처리 약제에 대한 사용 제한도 국내 혈액암 치료 환경의 심각한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현행 제도로는 이중특이항체 및 CAR-T 치료 환자에서 감염 예방을 위한 '면역글로불린', 사이토카인분비증후군(CRS) 치료를 위한 '토실리주맙', 신경독성증후군(ICANS) 치료를 위한 '아나킨라' 사용이 어렵다는 것이다.

일례로 인터루킨6(IL-6) 억제제인 '토실리주맙'은 현재 킴리아 치료에 발생하는 2등급 이상의 CRS 치료에만 급여가 적용되고 있다.

CRS 치료 적응증은 당초 토실리주맙 허가사항에 없는 허초 사용에 해당한다. CAR-T 치료의 대표적인 합병증인 CRS 관리에 토실리주맙이 유효하다는 연구 결과들이 발표되면서, 정부가 예외적으로 허초 사용에 급여를 적용해 준 것이다.

따라서 현재 급여 대상이 킴리아 치료 환자로 한정돼 있는 토실리주맙은 이중특이항체 치료 환자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

'아나킨라'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현재까지 ICANS 치료에 효과를 인정 받은 치료제는 스테로이드와 아나킨라뿐인데, 아나킨라는 국내에서 비급여로조차 사용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아나킨라는 과거 관절염 치료제로 사용되다가 국내 시장에서 철수한 IL-1억제제다. 식약처 허가사항이 없는 제품이기 때문에 희귀의약품센터를 통해 수입해 들여와도 심평원이 허초사용에 대한 심사 자체를 할 수가 없다.

대한혈액학회는 아나킨라가 이중특이항체 및 CAR-T 치료 합병증 관리에 필수 의약품임을 주장하며, 수년째 식약처와 심평원에 해결 방안을 모색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정부 측은 묵묵부답이다.

심평원은 허가초과 사용에 대한 심사는 식약처 허가가 전제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식약처는 제약사가 허가 신청을 하지 않는 이상 먼저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며 서로 '폭탄 돌리기'를 하고 있는 형국.

윤덕현 연구지원이사는 "이러한 상황에서 환자들을 살리기 위해 삭감뿐 아니라 임의비급여(불법) 위험을 감수하며 약물을 처방할 수 밖에 없는 게 지금 국내 의료진의 현실"이라고 호소했다.

김혜리 홍보이사는 "아나킨라 도입을 위해 원제조사에 문의했지만, 예상되는 약가 인하로 인해 한국시장에 진출할 계획이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라며 "아나킨라의 부재는 이중특이항체 및 CAR-T 치료에서 심각한 합병증을 관리하는 데 치명적인 공백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런 가운데 작년 한독이 아나킨라를 보유하고 있는 소비(Swedish Orphan Biovitrum, Sobi)'와 합작법인을 설립하면서 의료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특히, 한독은 한독소비를 통해 발작성 야간 혈색소뇨증(PNH) 치료제 '엠파벨리(성분명 페그세타코플란)'와 면역성 혈소판 감소증(ITP) 치료제 '도프텔렛(성분명 아바트롬보팍)' 등 혈액질환 파이프라인 확장에 주력하고 있어, 아나킨라 도입에 대한 기대도 커지고 있다.

개발된 지 20년이 지난 아나킨라에 대해 제약사가 ICANS 치료 적응증을 새롭게 업데이트할 가능성은 없지만, 토실리주맙과 같이 식약처 허가사항만이라도 있다면 추후 허가초과 사용에 대한 심사나 급여까지도 가능할 수 있기 때문.

다만 학회는 토실리주맙이나 아나킨라처럼 특허가 만료된 오래된 약물들에 대한 새로운 역할이 규명되었을 때, 이를 임상 현장에 발빠르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의료 기술에 발맞춘 유연한 규제 적용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제네릭이나 바이오시밀러가 나온 상황에서 새로운 적응증을 업데이트하기 위해 막대한 자본을 쓸 수 있는 제약사는 한정적이라는 것이다.

한편, 김석진 이사장은 "혈액암 분야의 이러한 정책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회 역시 새로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이사장은 "그 첫걸음으로 작년 7월부터 학회는 정책 세미나와 학술대회 정책 세션을 통해 정부와의 소통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며 "이제는 의사와 환자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이사장은 "오늘날의 의료 환경은 의사들이 정책을 만들고 실제 임상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여할 것을 요구한다"며 "학회는 개별 약물 승인이나 급여 결정뿐만 아니라, 의료 혁신에 적응하면서 환자 안전과 의료 시스템 지속 가능성을 보장할 수 있는 더 포괄적인 체계를 만드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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