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수 전 대한의사협회 총무이사
같은 의사라도 개원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환자가 줄어든다는 것, 환자가 없다는 것이 어떤 무게감으로 다가오는지 잘 모른다. 이번 달에 직원들 월급은 제대로 챙겨줄 수 있을지 노심초사 고민 고민하는 세월은 그 과정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어떤 심정일지 감히 헤아리지도 못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직원을 한 명 내보내고 또 한 명 내보내고 그렇게 버티다 버티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병원 문을 닫을 때 그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주변의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 동료들을 보면 2000년대 초중반부터 자기 전문과를 포기하고 미용성형으로 넘어가는 분들이 제법 있었다. 자기 전문과에 대해 자부심이 강했던 선배가 소청과를 접고 미용성형으로 넘어갈 때 마음이 많이 아팠었다. 단언하지만 자기 전문과와 개업생활을 접고 미용성형으로 넘어간 분들 중 즐거운 마음으로 신이 나서 넘어간 분은 한 분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는데도 의료정책을 담당하는 정부부서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대한민국은 1차의료라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정책이 대형병원을 위주로 돌아간다. 동네의원은 그저 비급여에 목매다는 ‘악의 축’ 취급이다. 그러니 동네 소청과가 문을 닫든지 동네 산부인과가 문들 닫든지 아무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요즘 문제가 되는 소청과 대란도 결국 동네의원이 아니라 병원이 무너지기 시작하니까 사회가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남도 끝자락 섬마을에서 노인 고혈압환자가 자기는 서너 달에 한번씩 서울 대형병원에서 고혈압 약을 타 먹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던 적이 2000년대 초반이었다. KTX가 생기기 전에도 그랬다. KTX가 전국에 깔린 지금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동네의원이 무너지면 전체 의료계가 무너진다고 의료전달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제일 시급하다고 누누이 말했지만 소귀에 경 읽기였다. 환자가 찾아가는데 어떻게 규제하느냐고 말한 것이 복지부 관료였고 시설 좋은 곳에서 더 전문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는데 왜 막느냐고 말한 것은 시민단체 관계자였다.
요즘 내 속에 불을 지르는 것은 어느 의료관리학과 교수다. 며칠 전 칼럼에서는 ‘외과 흉부외과 의사가 내과 간판을 걸고 고혈압 당뇨병 환자를 보는 것이 문제’라는 망발까지 서슴지 않았다. 혈압 혈당 관리가 제대로 안돼 심장병 뇌졸중이 더 많이 생기고 결국 병원비도 더 들어간단다. 지난 십수년 동안 주치의제를 줄기차게 주장하고 추진했던 것이 의료관리학과였는데 개원의의 90프로 이상이 전문의인 나라에서 어떤 전문의를 데리고 주치의제를 하겠다고 작정을 했을까 의문이 든다. 동네의원의 혈압 당뇨환자가 모조리 내과 전문의의 진료가 필요한 환자라면 어떤 환자들을 데리고 주치의제를 하겠다는 말이었냐고 되묻고 싶다.
지난 수십년 동안 한국 의료정책을 좌지우지한 게 바로 의료관리학교실이라는 것은 대한민국 의사들이라면 모두 아는 사실이다. 의료관리학교실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이분이 수행한 정부 용역만 봐도 화려하다. 응급의료 중장기 발전 방안 연구(2017). 상급종합병원 지정 평가 체계 개선 연구용역(2018). 의료공급체계 개선 모형 개발 연구(2018). 필수의료 진료권 구분 및 의료현황 분석(2018). 수도권 대형병원 환자 집중 개선을 위한 지역 중심의료체계 구축 방안 연구(2019). 요즘 이슈가 되는 것들이 거의 다 총망라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분이 이제 와서 ‘지난 수십년 동안 정부가 의사와 병원에 질질 끌려 다녔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의협은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산하 회원이 다른 회원들을 싸잡아 모욕하고 있는데도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있다. 온갖 매체에서 때를 만난 양 휘젓고 다니는데도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것인가.
자기 전문과를 떼어낸 의사들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고 이들이 의료생태계에서 자부심을 갖고 살아갈 토양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그들도 이 사회의 소중한 자산이다. 간판 떼어낸 외과 흉부외과 의사가 동네의원에서 고혈압 당뇨환자 본다고 비난하고 그래서 미형성형으로 넘어가면 돈만 밝힌다고 비난만 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내 환자는 없고 동네의원에서 볼 수 있는 정도의 환자도 못 보게 하고 미형성형도 악의 축처럼 몰아대면 도대체 어쩌라는 말인가. 있는 의사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데 해결책이라고 신규의사만 늘리면 그야말로 지옥문이 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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