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연 기자의 히포구라테스
정치 논리가 개입된 정책의 결과는 ‘혼돈’이다. 하루아침에 결정된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총선을 두 달 앞두고 발표된 이 정책은 정권의 기대와는 달리 득표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대신 의료체계 전반을 뒤흔들어 놓았다.
1년 6개월간 이어진 의정 갈등은 의료 현장을 파편화시켰다. 전공의들이 수련병원을 떠나자 병동과 수술실 등 현장 곳곳에는 공백이 생겼다. 진료지원 인력(PA)으로 그 자리를 메우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지방은 물론 수도권에서도 응급실 셧다운 소식이 들렸고 상급종합병원들은 중증·고난도 수술을 줄였다. 교수와 전임의들은 진료 하느라 연구할 시간을 잃었고, 이는 논문 감소로 이어졌다. 의료뿐만 아니라 의학 연구에도 경고등이 켜진 셈이다.
교육 현장도 마찬가지다. 의대 교육과 수련 일정이 꼬이면서 압축 수업과 ‘선(先) 시험, 후(後) 수련’, 인턴 수료 전 레지던트 지원 등 유례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더블링 혹은 트리플링된 24·25학번 의대생은 6년 내내 과밀화된 환경에서 공부해야 한다. 신규 의사 배출이 급감하면서 공중보건의사와 군의관 확보에도 비상이 걸렸다. 단기간에 끝날 문제도 아니며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정권은 바뀌었고 새 정부도 ‘의료 개혁’을 말한다. 그러나 의료 개혁은 정치적 수사나 단기성과를 위한 이벤트가 아니다. 의료는 매표의 수단도, 정권의 실적 채우기용 숫자놀음도 되어선 안 된다.
이번만큼은 정치 논리로부터 자유로운 개혁이 이뤄지길 바란다. 정책의 수혜자는 표가 아닌 국민이어야 하고, 정책의 중심에는 이해관계가 아닌 환자 안전과 의료의 지속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지난 1년 반의 혼돈은 ‘정치가 의료를 뒤흔들면 현장은 무너진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무너진 의료 시스템을 다시 작동하게 하려면 가장 먼저 의료인과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의료는 장비나 시설만으로 굴러가는 산업이 아니다. 고도의 전문 인력이 있어야 돌아간다. 현장의 의료인이 정책을 믿지 않으면 협조도, 실행도 불가능하다. 현장을 잘 아는 전문가의 의견이 배제되면 정책은 숫자와 구호만 남고, 결국 환자 안전이 위협받는다.
진정한 의료 개혁을 원한다면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예측 가능한 장기 로드맵을 제시해야 한다. 구호 대신 실행 가능한 절차와 계획을 통해 의료인이 안심하고 교육·진료·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이제는 혼돈의 반복을 끝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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