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휴의 의기충천(醫機衝天)
대한민국 의료기기 산업의 성장동력에 적신호가 걸렸다. 2024년 기준 생산 실적은 전년 대비 1.7% 감소했다. 디지털 제품군이 추가되고 수출이 소폭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적이 줄었다는 것은 내수 시장 문제만은 아니다.
수입 품목 수도 2020년 약 3만 개에서 2만 7천 개 수준으로 줄며, 수입 역시 2년 연속 감소세를 이어가고 있다. 일각에선 갱신제를 통한 정리 효과라며 긍정적으로 해석하지만, 문제는 그 속에 수익성은 낮지만 환자에게 필수적인 제품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필수 제품의 공급이 끊긴다면 환자 안전에 직격탄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위기의 배후에는 중소 제조업체들이 직면한 ‘삼중고’가 있다. 매출 부진, 높아지는 규제 비용, 그리고 수십 년째 제자리인 저수가 정책이다.
더욱이 최근 들어 인허가에 필요한 규제 비용은 물론 환경부담금, 면허세 등 각종 조세와 준조세 형태의 비용이 줄줄이 늘어나면서, 기업들은 이제 개발은커녕 기존 제품 유지조차 어려운 실정에 내몰리고 있다. 여기에 유통단계에서 간납사 수수료까지 붙게 되면, 결국 남는 게 없어 시장에서 퇴출되는 품목이 늘어난다. 이러한 흐름이 지속되면 필요한 의료기기조차 안정적으로 공급되지 않는, 국민 건강에 중대한 위협이 닥칠 것이다.
행정 비효율 또한 원인의 하나로 지적된다. 현재의 의료기기 인허가 과정은 지나치게 복잡하고, 기관 간 상호 견제를 이유로 심사와 인증 절차가 반복되면서 절차의 과정과 역할이 모호하고 비합리적이라는 지적이다.
심사기관에서 검토한 문서가 보완 요청률이 70%에 육박한다는 점은 그 자체로 구조적 문제라는 증거다. 수개월에 걸친 인허가 지연은 결국 기업의 손실로 이어지고, 이 비용은 고스란히 소비자와 환자에게 전가된다.
더 큰 문제는 이 모든 규제 환경에서 다국적 대기업과 국내 중소기업이 동일한 조건에서 경쟁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공정한 경쟁이라고 보기 어렵다. 미국처럼 중소기업에는 인허가 수수료를 감면하거나 시험·검사 비용을 차별화하는 등 현실적 지원이 절실하다. 중소기업 친화적이고 제조업 중심의 제도 설계 없이 지금의 구조를 방치한다면 운동장은 더욱 기울어 질수밖에 없다.
이제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따지는 것을 넘어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특히 보건복지부, 식품의약품안전처, 환경부, 기획재부, 산업통상자원부 등 여러 부처에 걸쳐 있는 규제·세제·유통 구조는 더 이상 개별 부처 차원에서 해결될 수 없다. 국정기획위원회를 중심으로 범정부 차원의 통합적 관리체계를 마련하고, 규제 효율화와 비용 구조의 조정이 동반되어야 한다.
의료기기 산업은 단순한 제조업이 아니다.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공공재의 성격을 지닌 핵심 산업이다. 건강보험이라는 공적 시스템의 효율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지나친 규제와 부담금, 복잡한 인허가 절차, 불합리한 유통 수수료에 대한 전면 재검토가 필요하다. 이는 단지 의료기기 산업 보호의 차원을 넘어, 국민 생명 보호를 위한 국가의 책임이자 의무다.
새 정부의 국정 기조가 ‘경제 살리기’라면, 의료기기 산업은 그 핵심 축 중 하나로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한국에서 의료기기 산업은 향후 세계적 먹거리 산업으로도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다. 인공지능 등 신기술과 결합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전환을 위해 지금 당장 구조개편과 정책 전환이 시작되어야 한다.
정부는 이제 결단해야 한다. 의료기기 산업의 위기는 곧 국민 건강의 위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