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아산병원 전공의들 제안으로 대전협 차원 의견수렴 시작
‘불가피한 의료사고 형사처벌 면책’ 필요성 강조
대전협 전·현직 임원도 공감…“소극적인 방어진료 조장”

의료계에서는 내부적으로 자정 노력을 하지 않으면 외부의 칼날을 피할 수 없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왔다. 하지만 주류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최근 젊은 의사들이 보이는 행보가 더 눈길을 끈다. ‘살인이나 강간 등 중범죄를 저지른 의료인은 면허를 취소해도 된다’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전공의 10명 중 7명은 살인이나 간강 등 중범죄를 저지른 의료인의 면허를 취소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한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나왔다(관련 기사: 전공의 69% "살인·강간 등 중범죄자는 의사면허 취소하자"). 서울아산병원 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가 대한전공의협의회에 제안해 진행된 설문조사였다.

서울아산병원 전공의들이 나선 이유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살인이나 강간 등을 저지르고도 의사면허를 유지하는 ‘중범죄자’로 인해 선의의 피해자가 양상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선의의 피해자’는 환자를 살리기 위해 했던 의료행위에 업무상 과실치사상죄가 적용돼 형사처벌을 받는 의사들이다.

가장 최근에는 장폐색 의심 환자에게 장정결제를 투여한 소화기내과 전문의가 금고형을 받으면서 법정 구속됐다. 그리고 국회에는 의료인 결격 사유를 확대해 금고형 이상 형사처벌을 받은 의료인에 대해서는 면허를 취소할 수 있도록 한 ‘의료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이 개정안이 그대로 국회를 통과하면 업무상 과실치사상으로도 의사 면허가 취소될 수 있다.

지난 13일 밤 서울아산병원에서 만난 전공의들은 불가피한 의료사고를 피할 수 없는 현실에서 업무상 과실치사상으로 이를 형사처벌하기 시작하면 환자 생명과 직결된 필수진료과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이미 그런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법안이 개정되면 필수진료과 기피현상은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날 인터뷰에는 서울아산병원 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 소속 서재현 전공의(정형외과 4년), 박한나 전공의(응급의학과 2년) 외에도 대전협 한재민 회장(에이치플러스 양지병원 인턴)과 서연주 전 대전협 부회장(가톨릭중앙의료원 내과 2년)도 함께 했다.

청년의사는 지난 13일 서울아산병원에서 전공의들과 인터뷰를 갖고 의료인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들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이 자리에는 서울아산병원 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 소속 전공의들과 대한전공의협의회 한재민 회장, 서연주 전 대전협 부회장도 함께 했다.
청년의사는 지난 13일 서울아산병원에서 전공의들과 인터뷰를 갖고 의료인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들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이 자리에는 서울아산병원 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 소속 전공의들과 대한전공의협의회 한재민 회장, 서연주 전 대전협 부회장도 함께 했다.

- 대장암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장정결제를 투여한 고령 환자가 사망한 사건으로 담당 내과 전문의와 전공의에게 금고형이 내려지고 전문의는 법정 구속됐다. 일선 의사들은 남의 일이 아니라고 느끼는 듯하다.

박한나: 응급 투석이나 고용량의 승압제(혈압을 올리는 약) 투여, 응급 수혈 등이 필요한 환자에게는 중심정맥관 삽입을 해야 한다. 응급의학과에서는 매일 여러 차례 시행하는 술기이고 중환자실에서도 전공의들이 많이 한다. 보통 목에 있는 굵은 경정맥에 카테터를 삽입한다. 이 때 경정맥 바로 옆으로 지나가는 경동맥을 찌른다거나 혈관 손상, 천공 등으로 인한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 숙련된 전공의, 전문의에게도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사고이며, 한시가 급한 응급실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우리 병원 응급실에서도 1년에 한두 번 이상 이런 사고가 일어난다. 보호자가 소송을 걸거나 법무팀에 문제 제기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응급의학과 전공의로 1년 반 정도 응급실에 있으면서 법무팀까지 간 사건이 5~6개 정도 있었다. 이런 사고가 일어나면 환자에게 해를 가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 그 술기를 또 하기 어렵게 된다. 이로 인해 응급실에서 정확한 판단과 술기의 타이밍을 놓칠 수 있다. 하물며 이런 사고가 형사처벌 대상이 되고 의사면허로 이어진다면 더 그렇지 않겠는가. 앞으로 바이탈(vital) 과를 하겠다는 의사는 더 줄고 피부미용을 하겠다는 의사만 늘어날 것이다.

서재현: 병원에는 생로병사가 다 있다. 죽는 사람 없는 병원이 어디 있겠는가. 항상 위험은 도사리고 있다. 위험은 의료에서 떼어낼 수 없는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더 안전하게 환자들을 진료할 수 있을까를 연구하고 시스템을 개선해 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게 의료사고다.

가이드라인대로 치료했는데 그 결과에 따라 형사처벌을 한다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어떻게 오류가 하나도 없을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현 의료체계 내에서는 완벽에 가까운, 100점짜리 의료를 모든 환자들에게 제공할 수 없다. 그런 의료 환경이 아니다. 최선의 진료가 아닌 방어진료부터 배우는 게 현재 의료의 모습이다.

중범죄를 저지른 의사를 처벌하는 문제와 의료사고를 업무상 과실치사상으로 처벌하는 문제는 별개다. 하지만 여론이 그렇지 않고 하루 이틀 새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의사들도 노력이 필요하고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려면 내부 자정도 필요하다.

서울아산병원 전공의협의회 비대위 소속 서재현 전공의(왼쪽)과 박한나 전공의는 중범죄를 저지른 의료인과 선의의 피해자를 구별해서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아산병원 전공의협의회 비대위 소속 서재현 전공의(왼쪽)과 박한나 전공의는 중범죄를 저지른 의료인과 선의의 피해자를 구별해서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살인이나 강간 등 중범죄를 저지른 의료인은 그 면허를 취소해도 된다는 의견을 밝힌 이유도 자정 노력 차원인가.

서재현: 중범죄자는 직업과 무관하게 처벌받는 게 마땅하다. 의사가 살인이나 강간 등 중범죄를 저질러서 더 나쁜 게 아니라 그 자체가 그냥 나쁜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무슨 일만 생기면 면허를 취소하겠다고 하는 것 같다.

박한나: 중범죄를 저지른 의사들이 면허를 유지한다는 사실에 여론이 더 나빠지는 경향도 있다. 그래서 중범죄와 불가피한 의료사고를 구분하지 않고 무조건 처벌을 강화하는 쪽으로만 논의되고 있어 안타깝다.

- 대전협에서 전공의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중범죄를 저지른 의료인의 면허를 취소해야 한다는 의견에 69.5%가 동의했다.

서재현: 나머지 30.5%도 면허 취소에 무조건 반대한다기보다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한번 물꼬를 트면 의료인 결격 사유가 중범죄 이외로도 더 확대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다. 의료 결정권을 충분히 보장받아 왔다면 중범죄 의료인 면허 취소에 대해 모든 전공의가 찬성했을 것이다. 그래서 신뢰가 중요하다. 그나마 전공의들 사이에서 중범죄 의료인 면허 취소에 찬성하는 비율이 높은 이유는 기성세대보다 아직은 순수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서연주: 중범죄자도 의료인 면허를 유지할 수 있다는 부분에 국민 여론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정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는 점도 알고 있다. 이 부분은 젊은 의사들이 나서서 자정 노력을 할 것이다. 하지만 불가피한 의료사고를 업무상 과실치사상으로 형사처벌하게 되면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진료를 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의사가 환자를 위해 더 열심히 진료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기게 된다.

- 의료계가 그동안 자정의 목소리를 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율징계권을 요구하기도 했다.

서재현: 중요한 이슈이긴 하다. 정부와 의료계 간 신뢰 문제도 있지만 의사들이 대한의사협회를 얼마나 신뢰하느냐는 문제도 있다. 이 부분도 같이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래도 옳은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69%가 넘는 전공의들이 중범죄 의료인 면허 취소에 찬성한 것이다.

- 의사 면허 등을 관리하는 독립적인 면허관리기구를 설립해야 한다는 필요성도 제기됐었다.

서연주 전 대전협 부회장은 의료계 자정 노력이 필요하며 이를 젊은 의사들이 주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연주 전 대전협 부회장은 의료계 자정 노력이 필요하며 이를 젊은 의사들이 주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연주: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면허관리체계는 분산돼 있다. 면허발급은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국시원)에서, 면허관리는 보건복지부, 보수교육관리는 의협이 하고 있다. 이것을 하나로 모아서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이 없다보니 사무장병원 같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의사들이 생각해도 비윤리적이고 처벌 받아 마땅한 의사가 면허를 유지하는 일이 생기고 있다. 면허를 관리·감독하고 처벌할 수 있는 독립적인 통제기구를 만들어야 효율적으로 면허를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기구가 없기 때문에 사법권에서 치고 들어오고 의료인 면허를 규제하는 법안들을 제정하려는 것 같다. 자정 작용이 이뤄진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 단 시간에 이뤄질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내부적으로 신뢰를 회복하고 충분한 소통을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서재현: 국민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도 옳은 길이라고 생각한다. 단기간에 이뤄낼 수 없다고 해도 중장기적으로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내부 컨센서스를 거쳐 모든 의사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건강한 면허관리기구를 설립할 수 있다.

- 중범죄 의료인의 면허를 취소할 수 있도록 의료법상 결격사유를 확대하되 불가피한 의료사고는 형사처벌하지 않도록 하는 게 자정 노력을 위해서도 중요하다는 것인가.

서연주: 면허와 진료권 보장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고 생각한다. 자정 작용을 통해서 우리가 이 정도의 윤리의식을 갖추고 자정하려고 노력하는 집단이라는 것을 먼저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래야 불합리한 의료제도를 개선해 의사들이 소신껏 진료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데도 힘이 실릴 것이다. 순차적으로 진행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 전공의들을 대표해 목소리를 내야 하는 대전협의 입장도 궁금하다. 서울아산병원 전공의들의 제안으로 대전협 차원에서 설문조사도 진행했고 많은 의견도 들었을 것이다.

대전협 한재민 회장은 불가피한 의료사고에 대한 형사처벌이 늘어날수록 중소병원들은 위험부담이 있는 의료시술을 기피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전협 한재민 회장은 불가피한 의료사고에 대한 형사처벌이 늘어날수록 중소병원들은 위험부담이 있는 의료시술을 기피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재민: 대형병원은 법무팀이 있어 (의료사고로 인해 소송이 제기돼도) 방어할 수 있지만 중소병원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비교적 흔하게 이뤄지는 시술이어도 위험성이 따르면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꼭 필요한 시술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리스크가 크다면 하기 힘든 게 중소병원의 현실이다. 불가피한 의료사고로 형사처벌을 받는 의사들이 늘어날수록 이런 현상을 더 심화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전공의들은 의사집단에서 가장 순진한 사람들이다. 이해타산적이지 않다. 정부와 여당이 기피과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제시한 정책들이 전혀 그 방향과 맞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행동했던 것이다. 단순히 의대 정원 확대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왜곡된 의료전달체계를 더 왜곡시키는 법안들이 나오고 있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배운대로 환자들을 최선을 다해 진료할 수 있는 환경을 원한다. 그리고 그게 의료정상화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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