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복귀했지만 ‘단체행동 블루’ 겪는 전공의들
세부분과로 번지는 바이탈 기피 현상
“우리만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전공의들

전공의들이 파업을 끝내고 병원으로 복귀한 지 한달이 지났다. 하지만 그 후유증으로 필수과 기피 현상을 더 심화됐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전공의들이 파업을 끝내고 병원으로 복귀한 지 한달이 지났다. 하지만 그 후유증으로 필수과 기피 현상을 더 심화됐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병원으로 복귀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전공의들은 여전히 단체행동 후유증을 앓고 있다. 이들은 ‘단체행동 블루’라고 표현했다. 병원을 아예 떠나거나 진로를 바꾼 전공의들도 있다. 이런 ‘이탈 현상’은 내과, 산부인과, 흉부외과 등 필수 진료과에서 일어났다.

가톨릭중앙의료원 내과 2년차인 서연주 전공의도 파업 이후 동료를 떠나보내야 했다. 흉부외과 전공의였다. 내과를 전공하고 싶다고 하던 후배 인턴은 파업 이후 “이런 의료 환경에서 내과 의사로 살아갈 자신이 없다”며 진로를 피부과로 바꿨다.

최근 만난 서연주 전공의는 “‘코로나 블루’처럼 전공의들 사이에서는 ‘단체행동 블루’가 심하다. 실제로 그만둔 전공의들이 많다. 특히 바이탈과는 더 심하다”며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서 전공의는 대한전공의협의회 부회장을 지내면서 전공의 단체행동을 이끌었다.

“흉부외과를 전공하던 친구도 이번에 그만뒀다. 하루에 몇 시간 못 자고 36시간, 40시간 연속 근무를 해도 흉부외과가 정말 재미있고 즐거워서 힘들지 않다고 했던 친구였다. 그런데 이번 일(단체행동)을 겪고 나서 ‘더이상 이렇게 살 자신이 없다’고 하더라. 그리고 그 친구는 사직서를 내고 병원을 나왔다. 이런 현실이 너무 가슴 아프다.”

이런 분위기는 전공의들의 진로 선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문의 자격 취득 후 전임의(펠로우)로 근무할 세부분과를 선택할 때도 바이탈과 관련이 적은 분과로 쏠리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했다.

“내과에도 소화기, 순환기, 호흡기, 내분비·대사, 혈액종양, 감염, 알레르기 등 여러 분과가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힘들고 고생하는 과보다는 내시경 시술 등을 배워서 개원할 수 있는 분과로 몰리고 있다. 힘든 과에서 펠로우를 하겠다는 전공의가 거의 없다.”

서연주 전공의는 단체행동을 하는 과정에서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환자를 살리는 의사가 되고 싶어서였는데 사람들은 돈밖에 몰라 밥그릇 싸움을 한다고 보더라. 댓글을 보며 상처를 받고 1인 시위를 하면서 맞았다는 친구들도 있었다. 병원으로 복귀한 후에도 사과하라는 등 비판적인 뉴스가 쏟아졌다. 그런 상황들을 겪다 보니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하는 패배감과 무력감, 실망감에 휩싸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죄책감이 들었다.”

청년의사는 지난 13일 서울아산병원에서 대전협 한재민 회장과 서연주 전 대전협 부회장, 서울아산병원 전공의들과 만나 파업 이후 상황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청년의사는 지난 13일 서울아산병원에서 대전협 한재민 회장과 서연주 전 대전협 부회장, 서울아산병원 전공의들과 만나 파업 이후 상황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파업 이후 필수진료과는 ‘금기과’ 됐다

다른 수련병원도 분위기는 비슷했다.

서울아산병원 정형외과 4년차 서재현 전공의는 “오죽하면 내과나 외과, 흉부외과 등을 ‘금기과’라고 하겠나. 전공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했다.

서재현 전공의는 “예전에는 서울아산병원 내과는 1등들의 무덤이었다. 수련병원별로 1등 인턴들이 와서 1등이 떨어지는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똘똘하면 내과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게 상식이 됐다”며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바꿔보자고 해서 전공의들이 나선 것이었다”고 말했다.

서재현 전공의는 “내가 나중에 나이가 들고 아플 때 제대로 된 의료, 올바른 의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이대로 가면 건강보험료는 건강보험료대로 내고 질 좋은 의료는 경험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이 강하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서로 ‘속 사정’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간호사 등 다른 의료종사자들도 파업이 길어지자 냉담한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서울아산병원 정형외과 3년차 김태형 전공의는 “병원 직원들은 우리의 뜻을 조금이라도 헤아려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파업이 길어지자 ‘환자를 버려두고 왜 돌아오지 않느냐’고 하더라. 그 순간 같이 일하는 직원들도 설득하지 못했구나 싶더라”며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고립돼 있고 우리는 보는 시선도 호의적이지 않다는 걸 체감했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에도 우리가 행동에 나선다면 이런 부분도 고려해야 한다”고도 했다.

같은 병원 응급의학과 2년차 박한나 전공의는 “단체행동으로 수술이나 입원이 연기됐고 원무팀이나 간호사들이 그 사실을 환자들에게 알려야 했다.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그래서 파업 마지막 주에는 전공의들이 다 투입돼 그 일을 하겠다고 했다”며 “환자와 다른 직종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됐다”고 했다.

“단체행동 후유증이 ‘백신’으로 작용” ‘다음’ 기약하는 전공의들

전공의들은 지난 파업으로 심한 후유증을 앓고 있지만 ‘다음’도 기약하고 있었다. 패배감과 무력감을 느꼈지만 뭉칠 수 있다는 ‘희망’도 봤기 때문이다. 병원 밖 사회에 관한 관심도 늘었다. 서울아산병원 전공의들을 중심으로 살인, 강간 등 중범죄를 저지른 의료인은 면허를 취소해도 된다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게 그 출발점이다.

서재현 전공의는 “단체행동으로 인해 후유증을 겪고 있지만 오히려 백신이 돼서 더 큰 도약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며 “파업에 대해서는 어느 직종이든 찬성보다 반대 여론이 더 많다. 앞으로 주변인들부터 조금씩 설득하면서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단체행동을 통해 우리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데는 두려울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장기적으로 꾸준히 아젠다를 제시하고 내부적으로 소통하고 합의점을 찾아가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박한나 전공의는 “의사 집단이 갖고 있는 문제를 내부에서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물꼬를 트겠다. 기득권의 밥그릇 싸움이 아니라 의료 환경을 개선하과 그 가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며 “환자 등 국민과 공감할 수 있도록 외부에서 지적하는 문제들을 먼저 개선하면서 우리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의사가 환자를 위해서만 진료할 수 있는 의료 환경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서연주 전공의는 “닥터 김사부를 꿈꾸며 의사가 됐는데 현실을 알게 되면 청담동 피부과 원장으로 꿈이 바뀐다.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세상이 됐다”며 “무너진 기반을 다시 다지려면 많은 재원이 필요하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티도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가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한국 의료를 책임질 의료인으로서 정의를 지키지 못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대전협 한재민 회장(에이치플러스 양지병원 인턴)은 내과 외과 등 필수과를 기피하게 된 의료 환경을 바꿀 수 있는 건 전공의들이라고 했다. 한 회장은 “환자의 생명과 안전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길 수 있는 의료가 돼야 하는데 정책은 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며 “전공의들이 바꿀 수 있고, 바꿔야 한다. 그리고 바뀌어 갈 것이다. 우리의 신념을 믿는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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