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협, 조합원 4만명 의사노조 추진…병원계, 실현 가능성에 부정적병원별 압박, 귀족노조 등 비판 넘어야
[청년의사 신문 송수연] ‘대한전공의노동조합’. 지난 2006년 7월 3일 노동부로부터 노조 설립 인가를 받은 국내 최초 의사노조다. 당시 이혁 전공의노조위원장은 “전공의노조는 임금인상을 목적으로 파업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열악한 전공의들의 근무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설립됐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귀족노조’라는 비판이 일었고 의료계 내부 참여율도 저조해 ‘이름뿐인 노조’로 전락했다.
그로부터 6년이 흐른 2012년 6월 28일 대한의사협회가 의사노조를 결성하겠다고 밝혔다. 노환규 회장은 “의사 권리 보호와 의료제도 개선을 위해서”라고 했다. 6년 전과 마찬가지로 파업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선을 그었지만 귀족노조라는 꼬리표가 붙었으며 병원계가 강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6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의사노조에 대한 인식은 크게 변하지 않은 셈이다. 의사노조가 설립된다고 해도 전공의노조의 전철을 밟지 않고 정착하기까지 많은 난관이 예상되는 상황이기도 하다.

의사도 노동자인 시대 열리나
대한의사협회가 올해 11월까지 ‘의사노동조합’을 설립하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전공의들의 노조 설립이 무산된 지 6년 만이며 규모는 더 커졌다. 전공의뿐만 아니라 개원의를 제외한 모든 의사들이 대상이다.
의협 노환규 집행부가 그리는 의사노조는 ‘산별노조’ 형식이다. 산별노조란 동일한 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노동자를 하나로 묶는 전국 규모의 노조를 말한다. 의협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전공의·전문의·교수 등 직능별 노조를 시·도 단위로 만든 후 이를 묶어 전국 규모의 의사노조를 설립할 계획이다. 내부에서는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이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산하로 들어가자는 말도 나왔다고 한다.
노조 가입 대상은 개인사업자로 분류되는 개원의와 공무원 신분인 공중보건의사와 군의관 등을 제외한 전문의, 교수 등 ‘취업 의사’로 4만5,000명(의협 추산) 정도다.
의협은 지난 2006년 이미 노조 설립 신고를 마친 전공의부터 공략할 계획이다. 의사들 중 전공의가 노조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고 노조 자체에 대한 반감도 적어 전국 단위의 의사노조를 설립하는 동력으로 삼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의협은 전공의노조는 빠르면 오는 9월경 설립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또한 대한전공의협의회가 전공의노조 설립에 앞장섰던 것처럼 직역별 노조를 설립하는 데는 관련 의협 산하 단체들이 주축이 될 것으로 보인다. 봉직의 권익 보호를 위한 대한병원의사협의회(이하 병의협)를 재건하려는 움직임도 노조 설립과 맞물려 있다. 의협은 지난달 30일 병의협 재건 준비위원회 발족식을 갖고 아주의대 정영기(정신건강의학과) 교수를 준비위원장으로 추대, 병의협 재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교수들의 경우 노조에 대한 반감이 크다고 판단, ‘교수노조’ 대신 ‘교수협의회’로 조직을 구성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의협은 이들 직역별 노조 설립을 서둘러 오는 11월에는 전국 단위의 의사노조를 탄생시킬 계획이다. 의사노조가 설립되면 근무환경 개선 등 이익단체의 목소리는 노조에서, 정부와의 정책 조율 등 전문가단체로서의 목소리는 협회에서 내는 식으로 역할도 분담할 예정이다.
송형곤 대변인은 “노조가 자생력을 키우기 전까지 의협은 병원 경영자 측에서 노조에 압력을 넣지 못하도록 막아줄 것”이라고 했다.
이번에도 명분은 전공의

노 회장은 전공의 300여명이 모인 ‘전국전공의결의대회’에서 의사노조 설립 계획을 처음 밝혔다. 이 자리에 모인 전공의들은 “의사 노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는 노 회장의 말에 거의 모두 손을 들며 동조했다.
의협이 의사노조 설립이 필요한 가장 큰 이유로 꼽는 게 주당 보통 100시간을 근무하는 ‘열악한 전공의 근무 환경’이다. 국내 최초로 전공의들 사이에서 노조가 설립된 것도 근무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전공의들이 의료계 내에서 상대적인 약자로 인식,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우는 데 목말라 있었다는 것이다.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의사노조 설립을 반겼다. 대전협 김일호 회장은 “2006년에 전공의노조 설립 신고는 됐지만 현재 활동하는 조합원이 없다. 조합원이 없는 노조는 의미가 없다”며 “6년 전보다 노조의 필요성 등에 대한 인식은 훨씬 나아졌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에는 노조 설립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며 “의협이라는 확실한 우군도 있기 때문에 단체행동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의협 송형곤 대변인은 “전공의들은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주당 100시간을 근무하고 있다”며 “근무여건이 열악한 것도 문제지만 의료사고가 발생했을 때 책임을 져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의협은 의사노조가 설립되면 현재 주당 100시간인 전공의 근무시간을 40시간으로 줄이는 ‘준법투쟁’도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병협 “전공의 선동해 혼란 야기” 발끈
하지만 의사노조가 설립되고 활동하기에는 6년 전과 마찬가지로 상황이 녹록치 않다. 무엇보다 병원계의 반발이 심해 의사노조가 설립된다고 해도 조합원을 모으는 과정이 순탄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대한병원협회는 의협이 의사노조를 설립하겠다고 밝히자 “관심을 끌기 위한 노이즈 마케팅”이라며 “실현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고 폄하했다. 병협은 “현재도 전공의노조가 조직돼 있으나 피교육자라는 신분과 사제 간 관계 등으로 인해 그 존재가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됐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삼스럽게 전공의를 선동해 혼란을 야기하려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비판했다. 병원 내 봉직의나 전공의들의 의협 회비를 일괄적으로 거둬 납부해 온 것을 중단하겠다는 엄포도 놓았다.
병협 이상석 상근부회장은 “봉직의 중에 누가 노조에 참여할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며 “봉직의들이 노조를 구성한다는 것은 신중히 검토해야 할 사안이고 바람직하지 않다. 무엇을 위해 노조를 구성하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의사노조에 대한 중소병원계의 시각은 더 냉담하다. 의사노조가 설립되면 병원 경영에 직격탄을 맞게 될 거라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대한중소병원협회 백성길 회장은 “병원 입장에서 전공의들이 근무하다가 단체행동을 하면 진료가 제대로 이뤄지겠느냐”며 “병원 경영자 측면에서 보면 마이너스 요인이 많다”고 말했다. 백 회장은 “의사의 권익을 찾는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지만 전공의들이 뭉쳐서 집단행동을 하면 병원 진료가 마비된다”며 “의사가 환자와 동떨어져 다른 역할을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국민의 입장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병원 경영진 ‘압박’ 뚫고 노조 가입할까
병원계의 이같은 반발은 전공의노조가 설립되던 6년 전에도 노조를 유명무실하게 만든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2006년에도 노조에 가입하려는 전공의들에 대해 병원별로 다양한 압박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의협은 이같은 상황을 인지하고 의사들이 노조에 자발적으로 가입할 수 있도록 외부의 압력을 막아내는 방어막 역할을 하겠다는 입장이다.
송형곤 대변인은 “수련의(인턴)나 전공의도 문제지만 가장 문제 되는 게 전임의, 펠로우”라며 “‘펠노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전임의들은 병원에 남아 교수가 되기 위해 무슨 일이든 참고 희생하기 때문에 병원 측에서 직접적으로 압력을 가해 (노조 가입을) 와해시킬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우려했다. 송 대변인은 “의협이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병원 경영자 측이 (노조에 가입하려는 의사들에게) 잘못된 압력을 넣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것”이라며 “그것만 해줘도 의사노조는 자립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의사들의 노조 참여율을 높이려면 근본적으로 노조가 의협 등 단체가 아닌 일반 의사들의 목소리를 반영한 활동을 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이주호 전략기획단장은 “전공의노조가 실패한 건 노조의 민주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라며 “정부와 경영진의 탄압을 이겨내려면 아래로부터의 단결이 중요한데 일부만 열심히 했다”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래(일반 의사들)로부터 만들어진 노조가 아닌 위(의협)에서 만든 노조다보니까 위에서 생각한 목적이 없어져 버리면 노조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고도 했다.
‘귀족노조’란 외부 비난도 걸림돌
의사노조가 정착하는 데는 ‘귀족노조’란 말로 대변되는 외부의 부정적인 시선도 걸림돌이다. 의협이 의사노조를 만들겠다고 밝히자마자 즉각 귀족노조란 비판이 나왔다.
또 포괄수가제 당연적용 문제 등으로 정부와 대립하고 있는 의협이 대정부 투쟁 수단으로 노조를 설립하려 한다는 시각도 있다. 노조 설립 후 파업을 통해 환자를 볼모로 정부와의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려 한다는 것이다. 정부도 의협의 의사노조 결성 발표에 진료거부 시 의료법 위반으로 처벌할 수 있다고 선부터 그었다.
이같은 비판에 대해 의협 송형곤 대변인은 “다른 노동자들이 갖는 가장 큰 무기가 파업이지만 우리는 갖기 힘들다”면서 “파업은 우리도 원치 않는다”고 반박했다. 그는 이어 “의사들이 그저 돈을 많이 버는 집단으로만 인식되고 있는데 이런 이미지를 바꾸는 게 중요하다”며 “윤리적, 도덕적이고 믿을 수 있는 집단이라는 이미지 메이킹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의사노조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만 있는 건 아니다. 노동계는 의료계의 노조 설립 움직임을 의미 있게 평가했다. 보건의료노조 이주호 단장은 “의사들이 노조라는 틀을 만든다는 건 중요하다. 노조라는 틀을 갖는 것 자체가 중요한 진전이다”고 강조했다.
의사노조에 대한 여론은 6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미 의료계는 전공의노조를 만들었다가 실패한 경험을 쌓은 바 있다. 전공의노조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는 의미다. 의사들이 이번에는 의료계 안팎의 부정적인 여론을 뚫고 노조다운 노조를 세울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