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암 진료, 붕괴에서 복원으로①] 의사도 환자도 떠나는 지방
거점병원 중심 지방 소아암 진료망 복원 프로젝트 닻을 올리다
소아암 거점병원 5곳 지정…진료체계 3가지 유형 나눠 '인건비' 지원
중증 소아질환 진료체계가 흔들리고 있다. 소아청소년과 전공 기피와 전문의 이탈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지방은 위기 수준이다. 보건복지부는 이를 해결하고자 지난해 ‘소아청소년암 진료체계 구축사업’을 시작했다. 청년의사는 이 사업이 불러온 변화와 남은 과제를 두 차례에 걸쳐 전한다.
소아암 환자 진료체계 복원을 위한 정부의 새로운 실험이 본격화됐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2024년 시작한 ‘소아청소년암 진료체계 구축사업’이다. 핵심은 ‘선택과 집중’이다. 진료 역량이 있는 의료기관을 중심으로 거점병원을 지정하고, 해당 병원에 의료진을 전략적으로 배치해 지역 진료망을 탄탄히 구축하는 방식이다.
단순한 진료 공백 메우기를 넘어 전국 어디서든 소아암 환자가 연속적이고 수준 높은 진료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게 목표다. 협력 진료 네트워크를 통해 병원 간 연계와 역할 분담을 명확히 하고, 지역 간 의료격차를 줄이는 데 방점을 두고 있다.
소아암 사각지대 이유…소아혈액종양 전문의 부족
정부가 소아암 진료체계 구축에 소매를 걷은 이유는 명확하다. 의료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이어도 소아암 환자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의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소아암 환자를 진료할 인력 부족 때문이다.
소청과 전공의 지원율이 2020년도 모집부터 곤두박질치기 시작하면서 2024년 기준으로 전체 정원 794명 중 실제 확보된 전공의는 252명(31.7%)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의대 정원 증원 사태로 인해 남은 인원은 37명(14.6%)뿐이다.
소청과는 전공의뿐 아니라 전임의도 부족하다. 특히 고난도 치료를 요하는 소아혈액종양 전문의는 2024년 기준 전국에 64명이 전부다. 이마저도 절반 가까이가 10년 내 은퇴를 앞두고 있지만 이들을 대체할 인력도 없다.
수도권 환자 쏠림도 문제다. 소아암 치료를 위해 수도권 병원으로 환자들이 몰리면서, 의료 인력도 수도권으로 이동한다. 대한소아혈액종양학회의 ‘지역별 소아혈액종양 전문의 분포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소아혈액종양 전문의 64명 중 60.9%인 39명이 수도권 대학병원에 근무 중이다. 이들 중 31명은 서울에 있다. 반면 울산과 강원에는 한 명도 없으며, 충북, 전북, 경북, 제주에는 1명씩만 있다.
이처럼 소아혈액종양 전문의가 전무하거나 1명뿐인 지역에서는 소아암 환자 진료 자체가 어렵다. 지난 2023년 국립암센터의 ‘권역별 소아암 환자 자체충족률’ 자료에 따르면, 소아혈액종양 전문의가 없는 강원 지역은 소아암 환자 자체충족률은 7.1%에 그쳤다. 전문의가 1명뿐인 충북(21.9%), 전북(30.2%), 제주(25.5%) 역시 낮은 수치를 보였다.
의사도 환자도 떠나는 지방 ‘심폐소생’ 시작
정부는 소아암 진료의 지역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국립암센터 ▲양산부산대병원 ▲충남대병원 ▲칠곡경북대병원 ▲화순전남대병원을 권역별 소아암 거점병원으로 지정했다. 단일한 모델을 일괄 적용하기보다 지역별 소아암 진료 상황을 고려해 진료체계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눴다. 진료체계는 ▲거점기관형 ▲지역개방형 ▲타지역 지원형으로 나뉜다.
먼저 거점기관형은 거점병원 내 전담팀을 구성해 소아혈액종양 전문의와 타 분과 소청과 전문의, 소청과 촉탁의를 중심으로 한 협력기반 진료체계를 운영하도록 했다. 이를 구성하기 위해 필요한 인력 채용을 위한 인건비를 정부가 지원하는 방식이다. 거점기관형에는 충남대병원, 화순전남대병원, 양산부산대병원이 참여하고 있다.
지역개방형 모델을 채택한 칠곡경북대병원은 거점병원 소속 소아혈액종양 전문의와 인근 협력병원 소속 소아혈액종양 전문의 또는 촉탁의와 진료계약 기반 협력체계를 운영한다. 거점병원인 칠곡경북대병원이 지역에 있는 대구파티마병원, 포항성모병원과 협력병원을 맺고 일정 시간 인력을 파견해 인력 네트워크를 구성했다.
칠곡경북대병원 소아혈액종양 전문의가 외래 진료와 보호자 상담을 맡고, 조혈모세포이식 수술을 진행한다. 또 주간과 공휴일 중환자실을 담당하며 소아암 환자 고난도 진료 핵심 역할을 수행한다. 지역 내 2차 병원에서 파견 온 소아혈액종양 전문의는 평일 주간 병동과 중환자실 입원 환자를 진료하고 응급사왕 발생 시 신속하게 지원한다. 지역 병·의원에서 파견된 소청과 전문의는 기본 당직 역할과 온콜 업무를 담당한다. 주간과 야간 입원환자 진료 뿐만 아니라 병동과 중환자실에서 주말과 공휴일 당직도 전담한다.
특히 지역개방형 진료체계의 경우 파견을 보낸 협력병원에서 인력이 빠질 경우 발생하는 기회비용에 대한 보상도 포함시켜 거점병원과 협력병원 간 인력 순환 실효성을 높였다.
타지역 지원형은 거점병원으로 지정된 국립암센터는 소아혈액종양 전문의를 소아암 진료 취약지역 협력병원에 파견해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소아암 환자들의 외래진료를 지원하고 있다. 필요 시 국립암센터를 포함한 수도권 내 의료기관으로 연계할 수 있다. 현재 국립암센터에서 파견한 소아혈액종양 전문의가 강원대병원에서 외래 진료를 보고 있다. 강원 지역은 소아혈액종양 전문의가 1명도 없는 곳이다.
멈췄던 소아암 진료체계 다시 움직여
이 사업을 통해 멈춰 섰던 지역 소아암 진료 시스템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역 상급종합병원이지만 그간 소아암 진료 인력이 부족해 조혈모세포이식 수술조차 할 수 없었던 곳들도 인력이 확보되면서 수술을 재개했다. 언제, 어떻게 상태가 나빠질지 모르는 소아암 환자들을 위한 24시간 온콜(대기진료)도 이전까지는 어려웠다면 이 사업을 통해 상시 진료 체계를 구축할 수 있게 됐다.
칠곡경북대병원 소아혈액종양과 김지윤 교수는 “대구는 지리적으로 위치가 애매하다. 서울에서는 대전으로 출퇴근이 가능하지만 대구는 그것도 힘들다. 인력을 충원하려 해도 (지원자가 없으니) 인맥으로 수소문해 인력을 구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더욱이 소청과나 소아혈액종양과처럼 수익성이 낮은 진료과는 병원에서 인력을 뽑아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번 사업에 참여하면서 교수 2명을 추가 채용할 수 있었다. 지난해 3월 이후 교수 3명, 파견 인력 3명 등 총 6명 체제로 진료 하고 있다”며 “지역에서 소아혈액종양 전문의 1명으로는 당직을 설 수도, (조혈모세포이식) 수술도 할 수 없다. 연구도 어렵다. 이같은 어려움이 이 사업을 통해 해소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의정 갈등 이후에도 이 시스템은 돌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라며 “다만 1년 단위로 연장되는 사업 특성상 불안감도 있다. 지역 의료기관 특성에 따라 자리를 잡고 운영되고 있는데 정부 지원이 한시적이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하다. 지역 소아암 진료체계를 넘어서 인력 운용의 새로운 모델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관련기사
- 의정 갈등에 혈액학 포기하려 했던 의사의 '돌아올 결심'…왜?
- 국립암센터의 ‘결단’…환자방 전전 소아암 환자 위한 ‘4P하우스’
- 빅5병원 암 환자 10명 중 4명 ‘비수도권 거주’…매년 20만명 서울로
- '소아의료' 당근책 쏟아낸 政…개선 실마리될까
- 5개 권역 ‘소아암거점병원’ 지정…소아혈액종양 의사는 69명뿐
- 소아암 환자 생존율 높아졌지만 장기관리체계 미비
- 올해 소청과 전공의 90% 수도권에…지방 소아진료 ‘위기’
- 소아의료 골든타임 “얼마 안남아”…소청과학회 ‘속도전’ 당부
- [특집] 붕괴되는 소아암 진료체계, 아직 희망은 있다
- ‘선택과 집중’ 1년…지방 소아암 진료, 얼마나 달라졌나
- 소청과의원 없는 지자체 58곳…"특수성 반영한 지원 절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