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체험기] '4월 파브리병 인식의 달', 환우의 이야기를 듣다
"진단을 받고 난 이후에도 가장 힘들었던 건 가족에게 유전자 검사를 권유하는 일이었어요. 누군가는 설명해야 하고, 이해를 구해야 하고, 오해도 감수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그걸 대부분 환자 본인이 해야 하죠."
4월 '파브리병 인식의 달(Fabry Awareness Month)'을 맞아 사노피가 진행한 사내 행사에서 만난 파브리코리아 장동기 회장의 말은 생각보다 오래 기자의 마음에 남았다.
지난 8일 사노피 임직원들은 파브리병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환자와 가족이 겪는 현실을 직접 들으며 공감하는 시간을 가졌고, 기자도 그 자리에 함께 했다.
쓰러진 순간부터 진단까지의 긴 여정
장 회장은 이날 본인의 진단 과정을 솔직하게 풀어놓았다. 그는 중년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쓰러졌고, 이후 여러 진료과를 전전한 끝에 파브리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병의 이름보다도 더 큰 고민은 그 다음부터 시작됐다. 가족에게 유전자 검사를 권하는 일이었다.
파브리병은 리소좀 효소인 알파-갈락토시다제 A(a-Gal A)가 결핍돼 세포 내에 GL-3(Gb-3)가 축적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심장, 신장, 뇌, 신경 등 여러 장기에 손상을 초래하는 유전성 희귀질환이다.
X염색체 열성 유전질환이라 유전 방식도 복잡하다. 아버지가 환자인 경우, 모든 딸에게 변이 유전자가 전달되고, 어머니가 환자인 경우에는 성별에 관계없이 자녀에게 50% 확률로 유전될 수 있다. 때문에 한 명의 환자가 진단되면 가족 전체에 대한 유전자 검사가 조기에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치료 시기를 앞당기고, 병의 진행을 늦출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가족에게 유전자 검사를 권하는 일은 민감하고, 때로는 관계에 균열을 낼 수도 있는 일이다. 장 회장은 "그 역할을 결국 환자 스스로가 감당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양한 증상과 낮은 인지도는 '진단 방랑' 초래해
파브리병은 증상이 워낙 다양하게 나타나고, 인지도도 낮다. 그 때문에 조기 진단이 어렵고, 대부분 여러 진료과를 전전하다가 병이 상당히 진행된 후에야 원인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미 신장, 심장, 뇌 등에 장기 손상이 일어난 이후라면, 치료를 해도 되돌릴 수 없다.
"조기 진단이 너무 중요한 병입니다. 하지만 그걸 가능하게 하는 가족 검사 자체가 장벽이에요. 이 구조 때문에 진단이 늦어지고, 결국 치료 시기도 놓치게 됩니다."
또 하나의 현실적인 장벽은 치료 접근성이다. 파브리병에는 효소대체요법(ERT) 같은 치료제가 존재하지만, 국내에서 '누가 치료를 받을 수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다.
장 회장은 "급여 기준이 증상 중심으로 설정돼 있기 때문에, 비교적 증상이 적은 환자들은 치료 시작 자체가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진단을 받았다고 해서 바로 치료로 이어지지 않는 이 구조는, 예방보다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증상이 드러난 이후에야 비로소 대응이 시작되는 시스템의 한계를 보여준다.
출산을 계획 중인 환자들에게도 또 다른 벽이 있다. '착상 전 유전자 검사(PGT)'는 유전 질환이 없는 배아를 선별해 임신을 준비할 수 있는 기술이지만, 현재 국내에서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환자들의 현실적 접근이 매우 어렵다.
장 회장은 "이 때문에 젊은 환자들이 결혼과 출산 자체를 미루거나 포기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고 토로했다.
청년 환자들의 고립, 그리고 이야기되지 못한 삶
장 회장이 가장 안타까움을 드러낸 부분은 '청년 환자들'이었다.
"통증 때문에 학업이나 직장 생활을 이어가지 못하고, 결국 집에 고립돼 있는 청년 환자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거의 없습니다."
그는 파브리병이 어떤 병인지조차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인 현실에서, 청년 환자들은 자신의 상태를 설명하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렵다고 했다. 제도적 지원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앞서 질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파브리지', 가족 간 대화 유도하고 검사로 이어질 수 있길
이날 현장에서는 가족 검사 진입 장벽을 낮추기 위한 새로운 도구도 소개됐다. '파브리지(Fa-bridge)'는 'Fabry'와 'Bridge'를 결합한 이름으로, 환자가 직접 디지털 가계도를 작성하고, 이를 통해 고위험군 가족을 파악할 수 있도록 돕는 디지털 툴킷이다.
간단한 가족 관계 정보 입력과 터치 몇 번으로 직관적으로 가계도를 그릴 수 있어, 환자와 가족이 함께 사용하는 데 부담이 적다. 또한 의료진과의 상담을 보다 효율적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실제 활용도가 높아 보였다.
이날 사내 행사에 함께한 사노피코리아 배경은 대표는 "올해 글로벌 파브리병 인식의 달 주제는 'Every Moment Matters'로, 모든 순간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며 "진단 전의 불안, 치료 결정의 혼란, 가족과의 대화에서 겪는 갈등까지, 파브리병 환자와 가족이 마주하는 수많은 순간들에 공감하고, 그 순간들이 자신감과 용기로 전환될 수 있도록 응원을 전하는 자리였다"고 소감을 전했다.
또한 "파브리병은 증상이 다양하고 인지도가 낮아 진단이 어려운 질환이지만, 한 명의 진단이 가족 전체의 건강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가족 검사는 조기 치료를 위한 중요한 열쇠"라며 "디지털 툴킷 '파브리지'가 실제로 환자와 가족 간의 대화를 유도하고, 검사로 이어질 수 있도록 돕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치료제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지만…"
"치료제가 있다는 것 자체에 감사하지만, 그 치료 기회를 갖는 것조차 환자 개인의 몫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무겁습니다."
장동기 회장의 마지막 말은 단지 한 명의 환자의 고백이 아닌, 많은 이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파브리병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한 이들에게, 이날의 이야기는 조금은 낯설고 멀게 느껴질 수 있었지만, 그 안에는 분명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질문이 담겨 있었다.
이 질병이 알려지고,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기를. 그 첫걸음이 바로 '관심'이라는 것을 기자는 현장에서 직접 느낄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