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욱 의협 대의원
보건복지부는 지난 7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브리핑에서 사직한 레지던트의 11% 625명이 진료현장에 복귀했다고 밝혔다. 14일 브리핑에서는 971명으로 늘었다. 언뜻 들어보면 사직한 전공의들이 복귀하여 수련을 재개한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정부가 말하는 진료 현장이 바뀌었다. 정부가 지난 2월 말부터 사직서를 낸 전공의들을 향해 ‘진료현장으로 돌아와 달라’고 했던 그 진료현장은 본래 근무하던 수련병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7일 이전까지 돌아오라고 했던 진료현장은 ‘수련’을 강요 받던 그 장소였다.
하지만 가을턴 모집마저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일까. 정부가 이야기하는 ‘진료현장’이 바뀌었다. 수련을 강요받던 수련병원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어디가 됐든 의료기관에 면허 등록만 되면 진료현장 복귀라고 했다.
이 갑작스러운 태세전환은 정부가 지난 6월 4일까지 사직서 수리금지 행정명령을 고수한 방침에 근본적 문제가 있었음을 반증한다. 전공의들은 수련을 포기했을 뿐 의업을 포기한 것이 아니며, 환자의 곁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 사직서만 수리해 주었으면 얼마든지 다른 의료기관에 취업해 의업에 종사하며 환자 곁에서 의료행위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막았던 것은 바로 보건복지부 조규홍 장관이었다. 복지부 장관은 행정명령을 통해 사직서를 받은 병원장들에게 수리를 금지했고, 그로 인해 수련을 포기한 전공의들은 타의에 의해 환자의 곁을 지킬 수 없게 됐다.
6월 4일부로 행정명령 철회를 통해 사직서 수리가 가능하게 됐지만, 취소가 아닌 철회였기 때문에 이전의 행정명령 효력은 유지됐다.
그렇다면 보건복지부 장관의 행정명령은 지난 2월말부터 6월 4일까지, 사직서를 낸 전공의들을 (현재 시점의) 진료현장에서 분리시켜 의료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볼 수 있다. 그 기간 대한민국에서 의사 1만명이 사라진 의료 공백은 복지부 장관이 만든 것이다.
주구장창 국민들이 겪는 불편은 다 의사 때문이라며 거짓말을 했지만 사실은 복지부 장관이 내린 행정명령 때문 아니었나.
진료 현장이 바뀌고 있다. 복지부가 약 3개월간 몽니를 부리며 전공의 사직서를 수리 못하게 막아두는 바람에 발생한 공백은 의료 수요의 이동에 지장을 초래했다.
상급종합병원 진료 축소로 의료 수요는 종합병원과 병원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지만, 그 수요를 감당하려면 인력 고용이 필요했다. 하지만 정부는 그것을 막았고 이들 의료기관도 금세 포화상태에 이르게 됐다.
만약 정부가 사직서 수리를 막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사직 전공의들의 일반의 채용이 종합병원과 2차 병원, 그리고 1차 의료기관에서 가능한 상태에서 의료수요가 이들 의료기관으로 늘어나기 시작할 때 고용 수요도 함께 늘어났을 것이다. 즉, 의료 수요가 3차에서 2차의료기관으로 이동하면서 의료 인력의 이동이 함께 이뤄지게 되기 때문에 사실상 공백이 크게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직서 수리가 풀린 지금, 조금씩 사직전공의들이 일반의로 진료현장, 수련병원이 아닌 의료기관으로 복귀하고 있다. 이들이 의업에 다시 종사하기 시작하면서 과부하가 걸려있던 의료 수요를 해결되기 시작하고 있다.
문제는 단 2곳, 정부와 값싼 노동력을 잃은 수련병원이다.
정부가 브리핑에서 ‘진료현장’의 정의를 바꾸면서까지 전공의들을 수련병원에 옭아매려고 했던 이유는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의 ‘전문의 중심 병원’이 가진 모순 때문이다. 전문의 중심병원을 표방하기 위해서는 전문의를 배출해야 하는데, 수련병원을 전문의 중심으로 만들어 버리면 전공의가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병원은 진료 행위를 통해 매출을 발생시키는데, 전문의 중심으로 진료 행위가 이루어지면 수익의 대부분을 전문의가 만들어내고 전공의들은 진료행위에서 밀려나게 된다. 수련은 진료행위를 통해 이뤄지는데 전공의들이 진료행위에서 밀려나면 어떻게 되겠나. 당연히 전공의 과정에서 수련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결국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뒤 전임의 과정이라는 세부 전문의 과정을 통해 추가 수련을 받아야 한다.
이는 지금까지 수년 동안 대한전공의협의회가 요구해왔던, 그리고 현재 대전협 비대위가 제시한 7대 요구안의 ‘수련환경 개선’ 부분에서 항상 제기돼 왔던 내용이다.
정부와 수련병원이 원하는 전공의의 역할은 단순히 낮은 임금으로 ‘의사’로서 일을 하는 자원으로 필요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정부가 필수의료패키지에서 제시했던 ‘전문의 중심 병원’과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은 양립할 수 없는 정책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공의 수련에 대한 획기적인 제도적 개선을 선행한 후,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교육을 위한 교수 인력의 확충, 그리고 진료 영역을 보강하기 위한 전문의 고용 등 수련병원의 의사인력 구조 변화를 위한 현실적인 정책을 제시했어야 했다.
그러한 선결 과제와 후행 정책의 순서 따위는 고민조차 하지 않은 채, 번호 나열식으로 제시하는 정책 발표 쇼를 한 복지부는 스스로 깊은 수렁에 빠져 버렸다. 의료개혁특위를 만들어 이제 와서 정책을 세부적으로 수립한다지만, 이미 나열해버린 정책은 갈 길을 잃어버렸다.
지질조사를 하고, 땅을 다진 후 기초공사를 해야 하는데, 토지의 상태도 모른 채 기초공사에 쓸 자재 종류를 고르는 회의를 하고 있으니 그 결과는 뻔하지 않겠나.
필수의료패키지에 나열식으로 나오는 아젠다는 대부분 1년전 의정협의체에서 제시됐던 것들이다. 의정협의체에서 제시는 되었는데 그 세부 내용을 논의하고 협의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목만 가져다 복지부 마음대로 만든 정책으로 제시된 것이다.
정부는 수차례 의정협의체에서 거론된 정책이라고 주장을 해왔다. 하지만 공개된 자료들을 보면 사실상 논의 주제만 상호 간 주고받은 상태에서 의대 정원 문제로 인해 회의가 공전만 돼 온 것으로 확인된다.
더 이상 정책이 망가진 채로 진행되지 않도록 대한의사협회가 바른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 의료개혁특위를 보이콧하고 브리핑이 나올 때마다 반대 성명만 낼 것이 아니라, 예상되는 정책의 문제점을 제시하고 그로 인한 피해를 홍보하고, 적절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의협이 전문가 단체로서 인정을 받고 역할을 하려면 ‘대안 제시’라는 정책기능을 해야 한다. 언제까지 고소장 들고 사진이나 찍으며 협회의 존재감을 나타내려 하는가.
관련기사
- 일반의로 대학병원 복귀?…사직전공의들 “왜 떠났는지 모르나”
- [기고] 회비 지출 문제 없다? 임현택 집행부의 견강부회
- “희생한 전공의·의대생들 돕자” 의협 대의원회에 금전 지원 청원
- ‘장기전’ 치르는 전공의들과 교류하려는 선배의사들
- [기고] 응답하라 선배들이여! 왜 답이 없는가
- [기고] 교수님, 제발 사직만 하지 말아 주십시오
- [기고] 양심 없는 대한민국 정부의 의료 정책
- [기고] 봉직의가 일할 병원이 없다
- [기고] 정부 사법 리스크 완화 정책은 반쪽짜리일 뿐이다
- [기고] 대한민국 의사 수는 적지만 부족하지 않다②
- [기고] 응급실 뺑뺑이 주범은 정부다
- [기고] 대한민국 의사 수는 적지만 부족하지 않다①
- 대학병원도, 의원도 취직 힘든 정신과 사직전공의…“그래도 복귀없다”
- 의협·의학회 “의개특위 중단하고 새 논의체 구성하라”
- [기고] 미래 세대인 전공의·의대생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방법
- 사직전공의 절반 이상 ‘의원급’ 재취업…‘서울-일반의’ 多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