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회 의료접근성 향상으로 커뮤니티 케어 기반 될 수 있어
분절된 정책·낮은 의료기관 참여율·홍보 부족에 제대로 역할 못해
"사회가 지역사회 안에서 '나이 듦'에 대해 고민하고 준비해야"

6월 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접종으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창신동 정가정의원 정명관 원장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여긴 명륜동인데요, 혹시 왕진 와주실 수 있나요? 저희 아버지가 의사 선생님을 꼭 봬야 하는데…."

아흔이 넘은 아버지가 병세가 완연한데도 병원을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 고민하던 딸이 건 전화였다. 무작정 병원 진료를 거부하는 아버지에 발만 동동 구르다가 우연찮게 왕진을 하는 곳이 있단 말에 '우리가 못 가면 의사 선생님을 모셔오자'하고 당장 전화를 들었다. 그러나 정 원장과 연결되기까지 가족과 지인을 비롯해 10명 넘는 인원이 하루를 꼬박 매달려야 했다.

"분명히 왕진한다고 명단엔 있는데 막상 전화를 걸면 다들 안 한다는 거예요. 하루 종일 몇 십 통을 걸었는데 거절만 당해서 눈 앞이 캄캄했어요. 정 원장님이 오시겠다니까 '세상에, 신이시여' 소리가 절로 나오더라고요. 그만큼 절박했어요."

'방문진료(왕진) 수가 시범사업'은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의 의료 접근성을 개선하고 커뮤니티 케어 기반 확보를 위해 지난 2019년 시작됐다. 348개 의료기관이 사업에 참여했지만 지난 2년 간 실제 왕진을 진행한 비율은 30%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낮은 참여율에 안내 시스템도 부족해 환자·보호자들이 일일이 명단을 대조해가며 왕진을 부탁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정을 아는 정 원장은 바쁜 일정과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왕진 가방을 꾸렸다.

지난 19일 오후 방문한 명륜동 한 가정집에서 정가정의원 정명관 원장과 간호사가 함께  환자 상태를 살피고 있다. 가족들은 거실 한 켠에 침상을 마련하고 환자를 모셨다.
지난 19일 오후 방문한 명륜동 한 가정집에서 정가정의원 정명관 원장과 간호사가 함께 환자 상태를 살피고 있다. 가족들은 거실 한 켠에 침상을 마련하고 환자를 모셨다.

"왕진을 나오면 어릴 적에나 있었지 지금은 없어진 줄 알았다고들 합니다. 그만큼 홍보도 부족했고 의료기관의 의지도 부족했죠. 정부에서도 커뮤니티 케어를 한다면서 별 고민도 없이 '그럼 왕진도 해보자'는 식으로 시작한 게 문제입니다."

지난 19일 주말 오후, 정 원장의 두 번째 명륜동 왕진길에 동행했다. 첫 번째 방문에서 정 원장의 진료를 받고 병원 치료를 마친 환자가 입원을 마다하고 집에 돌아와 다시 한 번 왕진을 청했다.

창신동에서 명륜동까지 차로 15분 남짓 걸리는 이번 왕진은 정 원장이 움직일 수 있는 최대 반경에 아슬아슬하게 걸친다. 대부분 왕진은 원래부터 단골로 내원하던 환자들이 알음알음 부탁하는 경우가 많다. 점심시간에 짬을 내 걸어서 동네 한 바퀴하는, 말 그대로 마을 주치의인 셈이다.

"10년 넘게 고혈압 약을 받으러 꼬박꼬박 오다 이제 문 밖 출입을 못하는 분도 계시고 파킨슨 병에 걸려 부축을 받아야 거동이 가능한 분도 계세요. 왕진은 커뮤니티 케어의 밑그림 같은 역할이에요. 가정을 떠나 병원에 입원하지 않아도 지역사회 내에서 돌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죠."

일행을 반갑게 맞은 보호자가 거실 한 켠에 마련한 침상으로 안내했다. 환자가 있는 가정이지만 분위기는 따스하고 편안했다. 마주보는 식탁에 앉은 환자의 배우자와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 원장이 왕진 가방을 열고 진료를 시작했다.

정 원장의 왕진 가방 내부 모습. 실용성을 염두해 카메라 가방을 왕진 가방으로 쓰고 있다. 
정 원장의 왕진 가방 내부 모습. 실용성을 염두해 카메라 가방을 왕진 가방으로 쓰고 있다.

정 원장의 왕진 가방은 흔히들 떠올리는 똑딱이 가죽 가방이 아니다. 출사 다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카메라 가방을 쓰고 있다. 튼튼하고 가벼운 데다 수납력도 좋다. 청진기와 혈당계·혈압계, 체온계는 물론 아나필락시스 쇼크 같은 응급 상황에 대비해 주사제도 종류별로 들어있다.

진료 내내 가래를 뱉어내는 환자의 뒷정리를 도맡은 딸이 아버지의 여윈 발목을 쓰다듬으며 정 원장의 설명을 들었다.

"병원에선 아무리 신경 써주셔도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환자 중 하나에 불과하단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요. 하지만 정 원장님이 방문하신 시간만큼은 저희 아버지가 온전히 단 한 사람으로서 진료 받으시는 거예요. 그것만으로도 큰 위로와 힘이 돼죠."

진료를 마친 정 원장이 식사에 어려움을 겪는 환자를 위해 영양 수액을 놓기로 하자 즉시 안방 옷걸이가 링거대로 변신한다. 혼자 링거를 관리해야 하는 보호자를 위해 간호사가 과정 하나하나 꼼꼼하게 챙겼다.

"덕분에 아버지가 병원 치료도 받으시고 집에 돌아와서 이렇게 계실 수 있어요."

40분 넘게 이어진 진료를 마치고 정 원장과 간호사가 조심조심 집을 나서자 기척을 알아 챈 환자가 말 없이 엄지를 척 치켜세우며 미소로 배웅했다.

우리나라는 지난 해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율이 15%를 넘었다. 오는 2050년이면 이 수치가 40%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사회는 빠르게 나이 들어가는데 그에 대한 고민과 준비는 부족하다는 게 정 원장의 걱정이다.

"꼭 심각한 병에 걸리지 않더라도 사람은 나이 듦에 따라 언젠가 거동이 불편하고 돌봄이 필요해져요. 이런 '나이 듦'에 대해 우리 사회가 준비가 안 돼있어요. 무조건 다 병원에 입원시키고 마는 게 올바른 방향일까요?"

이런 문제 의식에서 커뮤니티 케어에 대한 정책 연구와 제도 도입이 진행 중이지만 정 원장은 정부가 커뮤니티 케어를 개별 사업으로 조각내서 분절적으로 운영한다고 지적했다.

"커뮤니티 케어가 제대로 이뤄지려면 보건과 복지 양 측면이 함께 가야 합니다. 왕진 사업도 그 지역 가정 내 환자를 제대로 돌볼 수 있는 일차 의료기관 중심으로 선발해서 관리하고 사회복지시설이나 호스피스 기관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그 진가를 제대로 발휘할 수 있습니다."

내가 평생 살아온 동네에서, 가족과 이웃·친구들과 함께 나이 들어가길 바라는 작은 소망에 우리 사회가 더 귀기울일 시점이다.

"저도 거창한 사명감으로 왕진에 나서는 건 아니에요. 그냥 거기 환자가 있으니까 의사가 가는 거죠."

왕진 시범 사업을 시작하고 2년 간 고민한 끝에 최근 장만한 왕진용 전기차 앞에 선 정 원장. 비록 자동차 전용도로 진출은 꿈도 못 꾸지만 환자들이 사는 동네 골목길 틈새를 쏙쏙 찾아들어가는 기특한 차다. 정 원장은 이 차와 함께 앞으로 더 많은 환자를 찾아갈 생각이다.
왕진 시범 사업을 시작하고 2년 간 고민한 끝에 최근 장만한 왕진용 전기차 앞에 선 정 원장. 비록 자동차 전용도로 진출은 꿈도 못 꾸지만 환자들이 사는 동네 골목길 틈새를 쏙쏙 찾아들어가는 기특한 차다. 정 원장은 이 차와 함께 앞으로 더 많은 환자를 찾아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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