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한 업무범위로 척추마취 대법원 판례 후 불법 논란 휩싸여“의사 지시 하에 마취 가능” vs “마취는 의료행위”
[청년의사 신문 송수연] 마취전문간호사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지난 1973년부터 법적으로 인정돼 왔던 지위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대법원이 마취전문간호사 A씨에 대한 업무상과실치사죄를 인정하면서 척추마취는 의료행위로 의사의 지시가 있었다고 해도 마취전문간호사가 직접 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린 게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법원은 A씨가 의사의 구체적인 지시 없이 독자적으로 마취약제와 사용량을 결정해 치핵 제거 수술을 받을 환자에게 척추마취 시술을 한 것과 현장을 이탈하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에 비추어 업무상과실치사죄가 인정된다고 봤다. 특히 “전문간호사라고 하더라도 마취 분야에 전문성을 갖는 간호사인 자격을 인정받은 것 뿐”이라며 “비록 의사의 지시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의사만이 할 수 있는 의료행위를 직접 할 수 없는 것은 다른 간호사와 마찬가지이므로 의료법 위반이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마취전문간호사들은 대법원 판결 이후 잠재적 범법자로 몰리고 있다며 업무 규정을 명문화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대한간호협회 마취간호사회는 지난 4월 30일 새정치민주연합 최동익 의원과 함께 ‘마취전문간호사 제도 개선을 위한 공청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전문간호사 자격시험을 주관하는 한국간호교육평가원에 따르면 2014년 현재 마취전문간호사는 619명이며 이들 중 자격시험 시행 후 마취전문간호사가 된 사람은 49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570명은 자격시험이 도입(2005년)되기 전에 마취전문간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마취간호사회에서 발표한 ‘2010년 마취전문간호사 실태 조사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활동하고 있는 마취전문간호사 270명 중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가 있는 의료기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간호사는 53%이며 나머지 47%는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가 상주하지 않는 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취전문간호사 업무 어디까지?
마취간호사회는 정부가 법적으로 자격을 인정하는 전문간호사제도를 도입해 인력을 양성해 놓고 업무 범위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지 않아 마취전문간호사들을 범법자로 만들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린다.
대법원 판결이 있기 전까지 보건복지부는 유권해석(1991년)을 통해 ‘마취전문간호사가 의사의 지도·감독 하에 마취 시술 등 진료보조행위를 하는 것은 의료법상 적법한 행위이며 다른 의료기관으로부터 초빙을 받고 수술 집도의의 지시 감독 하에 마취행위를 하는 것도 무방하다’고 해석했고, 이에 의거해 그동안 마취전문간호사들이 마취 행위를 해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법원 판결 이후 집도의의 지시 하에 전신마취나 척추마취를 한 마취전문간호사들에 대한 고소·고발이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마취간호사회는 대법원 판결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입장이다. 정부가 실무 능력을 인정해서 법적인 자격을 부여한 전문간호사의 업무 범위를 일반 간호사와 동일하게 본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전문간호사 자격 인정 등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최근 10년 내 해당 분야 기관에서 3년 이상 실무경력을 쌓은 간호사가 대학원(석사)에서 교육을 받은 뒤 자격시험에 합격해야 마취전문간호사로 활동할 수 있다. 실무경력으로 인정되는 기관은 마취통증의학과, 회복실, 당일수술센터 및 통증클리닉이다.
마취간호사회는 “현재 의료법에는 마취전문간호사의 자격 인정요건에 대한 내용만 복지부령인 규칙에 명시돼 있고 업무범위에 대한 구체적인 법안이 마련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의료현장에서 마취행위를 시행하는 마취전문간호사는 역할의 혼란과 의료법 위반이라는 불합리한 상황에 처해 있다”며 “마취전문간호사의 역할을 정립하고 업무 범위에 대한 법제화로 현장에서 마취를 행하고 있는 마취전문간호사들이 당당히 마취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간호계는 의사의 지시·감독 하에서 마취전문간호사가 하는 마취는 적법한 행위로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대한간호협회 관계자는 “마취전문간호사가 단독으로 마취를 하겠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의사의 지시·감독 하에서 이뤄지는 마취행위는 인정해 달라는 것”이라며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가 아닌 안과나 정형외과 등의 타과 전문의보다 마취는 마취전문간호사가 더 잘 할 것이다. 의사의 지시·감독 하에 시행하는 것까지 막겠다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마취 주사를 놓는 것만 문제가 아니다. 마취를 한 후 의식이 회복될 때까지 환자들을 관찰해야 하는데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들이 이 모든 업무를 다할 수는 없다”며 “환자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더 많은 마취전문간호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마취는 의료행위로 의사가 해야”
이에 대해 의료계와 복지부는 시대 흐름을 역행하는 것이라며 대법원 판결을 토대로 전문간호사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복지부 임을기 의료자원과장은 “의료법에 간호사의 업무 범위가 명확하지 않은 것은 맞지만, 그 이유 중 하나는 전문 분야이고 의료 현장과 환자 상태가 다 다르기 때문”이라며 “과거에는 마취를 진료보조행위로 봤지만 현재 시점에서 다른 진료와 다르게 환자 사망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만큼 의사의 직접적인 의료행위라고 본 게 판결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임 과장은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가 아닌) 의사도 못 믿겠으니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가 해야 한다는 게 현재 국민적 요구”라며 “포괄적으로 마취전문간호사가 예전처럼 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대한의사협회는 마취가 의료행위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의협 신현영 홍보이사 겸 대변인은 “마취간호사가 직접 환자에게 마취액을 주사해 척추마취를 시행하는 행위는 의료법상 무면허의료행위에 해당한다는 것이 판례”라며 “마취행위는 고도의 전문지식과 경험을 요하는 행위이므로 의사만이 할 수 있는 의료행위”라고 말했다. 신 대변인은 “마취전문간호사라 할지라도 그 업무 범위는 진료보조행위에 국한한다”며 “비록 의사의 지시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독자적으로 마취행위를 수행할 수는 없다”고 했다.
가장 단호한 입장을 보이는 직역은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들이다. 대한마취통증의학회는 마취전문간호사의 업무 범위를 ‘마취진료보조’로 명확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취전문간호사가 어떤 경우에서든 직접 마취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마취통증의학회는 전신마취 시 마취유도(induction)와 각성, 발관 등과 척추마취 시 척추 주사는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나 마취에 대한 소정의 교육을 받은 의사가 직접 수행해야 한다며 마취전문간호사는 이를 보조하는 업무만 하면 된다고 했다.
마취통증의학회 이국현 이사장은 “환자 안전을 위해 마취전문간호사는 독자적으로 마취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며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 혹은 소정의 교육을 받은 의사의 지시·감독 하에 마취진료보조행위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은 이어 “의료행위를 의사가 직접 하지 않고 간호사에게 시키는 것은 무면허의료행위를 방조하는 것으로 처벌받을 수도 있는 환경이 됐다”며 “이미 대법원이 법률적 판단을 내린 상황에서 학회 차원에서 그 이외의 것을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고 했다.
의료계가 경제적인 이유로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보다는 마취전문간호사를 활용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마취통증의학회가 2013년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 비전속 의료기관의 전신마취 현황을 분석한 결과,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가 상주하지 않는 의료기관에서 이뤄지는 전신마취 중 절반 이상(56.7%)이 비(非)전문의에 의해 시행되고 있었다고 발표했다. 학회는 이중 상당수는 의사가 아닌 간호사나 간호조무사 등이 시행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마취통증의학회 홍성진 홍보이사(가톨릭의대 교수)는 “마취전문의가 전속하지 않는 의료기관에서 전신마취료를 청구하면서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 초빙료는 청구하지 않는 경우가 56.7%였다”며 “이는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가 아닌 사람이 마취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홍 이사는 “외과 의사가 수술을 하면서 전신마취를 동시에 시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며 “마취 수가가 워낙 싸기 때문에 일반 의사가 수익이 나지 않는 마취를 수가도 못받으면서 할 리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간호사나 마취를 배운 간호조무사, 의료기사 등 의료 인력이 불법으로 시행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홍 이사는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가 아닌 사람에 의한 전신마취는 서울 지역 의료기관에서 가장 많이 시행되고 있으며 그 다음이 부산과 경기 지역”이라며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가 없는 의료취약지에서 마취전문간호사에게 전신마취를 의뢰한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전신·척추마취만 안 된다?
그러나 마취전문간호사의 업무 범위에 대해서는 복지부와 의료계, 마취통증의학과와 타과 사이에 미묘한 온도차가 느껴져 향후 논의 과정에서 진통이 예상된다.
전문간호사제도 자체에 대한 개선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복지부는 대법원 판결에 따라 전신마취와 척추마취는 의사의 지시·감독 하에서라도 마취전문간호사가 할 수 없다고 했지만 그 외에는 의사 지시 하에 허용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복지부 관계자는 “전신마취나 척추마취는 고난도이기 때문에 의사가 직접 해야 하지만 수면유도제 등을 이용한 마취는 의사가 용량과 용법을 구체적으로 지시하면 간호사가 할 수 있다”며 “의사가 지시를 구체적으로 내려야 하고 환자 모니터링은 의사가 직접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마취통증의학회는 마취전문간호사의 업무를 환자 감시와 마취진료보조에 국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마취통증의학회 홍성진 홍보이사는 “마취간호사회가 있고 회복마취간호사회가 있는데 회복마취간호사는 주로 마취 중 환자 상태 등을 감시하는 업무를 한다”며 “마취를 직접 하지는 않고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가 진료할 때 옆에서 환자를 상태를 감시하고 진료보조 역할을 한다. 마취전문간호사 업무를 그렇게 정해주면 혼란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홍 이사는 “마취전문간호사는 환자 상태를 모니터링해주는 업무를 하면 된다. 환자가 의식을 회복할 때까지 모든 책임은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가 지는 것”이라며 “술기 자체를 마취전문간호사가 하는 것은 난센스”라고 했다.
마취는 의료행위라고 명확히 선을 그었지만 환자 안전을 위해 마취전문간호사가 양성돼야 한다는 데는 간호계와 입장을 같이했다. 홍 이사는 “마취전문간호사 제도 자체를 부정하겠다는 게 아니다. 환자 안전을 위해서라도 마취전문간호사가 필요하다”며 “마취전문간호사들이 전문성이 있기 때문에 마취 상태인 환자들을 더 잘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부 개원가에서는 마취통증의학회에서 마취 관련 기준을 너무 강화하려 한다며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 개원의는 “의사가 마취액을 어떻게 얼마나 넣으라고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간호사는 시행만 하는 건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며 “모든 마취를 다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가 해야 하는 것처럼 몰아가는 것 같아 불쾌하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