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형 고려대안암병원 내과 전공의 3년차
의사에게 인생 환자가 있듯이, 의국에도 그런 환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 타이틀을 무려 두 개의 과에 걸쳐 가지고 있는 환자가 있었다. 호흡기내과와 흉부외과 의국의 ‘인생 환자’ 타이틀 2관왕을 성취한 사내.
‘비만 유발성 급성호흡곤란증후군’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진단명을 가지고 중환자실로 들어와, 두 달간의 기계호흡과 체외막순환기(ECMO)치료 끝에 60kg을 감량하고 당당히 살아난 역전의 사나이. 퇴원 날 의료진과 함께 찍은 사진은 흉부외과 의국에 자랑스럽게 걸려 있었다.
마지막 근황 또한 전설과도 같았다. 당시 주치의였던 전공의가 소화기내과 임상강사가 되어 밤에 야식을 시켰는데 다름 아닌 배달부로 온 그 환자와 마주쳤다는 것이다. 그것도 살이 확 빠진 모습으로. 물론 우연의 일치였고 둘 모두 적잖이 놀랐겠지만 훈훈한 미담이었다. 밤낮 새가며 살린 중증환자가 걸어서 퇴원하고 사회에 완벽히 복귀했다는 뜻이니까. 그는 그렇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병원에 남기고 떠났다. 그렇게 떠났어야 했는데.
새벽 3시. 누군가는 깊은 잠이 들 시간이지만, 내과 당직의에게는 한창 일할 시간이다. 나는 응급실 당직의로, 응급실에서 내과로 의뢰된 환자를 케어하는 중이었다. 헌데 환자목록을 새로 고침 하던 도중 익숙한 이름이 하나 보였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데… 전설의 주인공이 거기 있었다. 난 곧바로 가운을 챙겨 입고 내려갔다. 왠지 모를 싸한 느낌이 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끼면서.
응급실에 도착하니 차라리 ‘덩어리’라고 표현하는 게 더 그럴듯한 거대한 몸뚱이가 구석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환자의 가로 폭이 침대의 가로 폭을 이미 넘었다. 키가 작아서 가로와 세로가 엇비슷했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하니 하며 이름표를 보니 그 분이 맞았다.
훈훈한 미담의 주인공은 어디 갔단 말인가. 침대의 체중계는 180kg을 찍고 있었다. 베드의 측정 한계가 180kg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실제 몸무게는 그보다 더 되리라.
문진을 직접 해보니 더더욱 기가 찼다. 응급실에 실려 온 이유는 ‘고환이 부었어요’인데, 보아하니 부은 것이 아니라 욕창이 생긴 것이고, 욕창이 생긴 이유는 며칠 전부터 살이 너무 쪄서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 원인이었다.
그것만 해도 황당한 이유인데, 더 큰 문제는 마스크로 산소를 최고농도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소 포화도 수치가 90이 채 안 된다는 것이었다. 중증도로 따지면 이쪽이 훨씬 더 심각한 문제였지만 둘을 유발한 원인은 하나였으니 통하는 게 있었다. 고도비만.
그 사이 동맥혈검사 수치가 나왔다. 산소수치는 50. 하한치인 60을 한참 밑돌았고, 이산화탄소 수치는 상한치인 45를 한창 웃도는 80이었다. 저산소혈증, 고이산화탄소혈증. 두 사신이 사이좋게 나란히 환자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니, 어떻게 이산화탄소 수치가 이렇게 높은데 의식이 멀쩡한 거야?’
이산화탄소 수치가 높아지면 의식장애가 뒤따른다. 이산화탄소혼수라고, 의대생 때 배우는 상식이다. 그러나 눈앞의 환자는 상식을 비웃듯이 의식이 청명하기 그지없었다.
“환자분, 작년에는 배민 라이더 열심히 하셨는데 왜 이렇게 되셨어요?”
“제가 먹는 걸 너무 좋아해서요.”
“환자분 지금 당장 인공호흡기 달아야 해요. 아니면 죽을 수도 있어요.”
“아, 저 또 에크모 해야 해요?”
에크모. 심장이나 폐가 제 기능을 못할 때 일시적으로나마 환자를 소생시키기 위해 삽입하는, 말하자면 현대의학의 마지막 보루 같은 물건이다. 그런 물건을 꼭 저녁 식사 메뉴처럼 이야기하는 환자의 태도에, 나는 울 것 같은 심정에도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것도 달아야 할지 몰라요.”
“제가 내일부터 식사를 줄이고 다이어트를 할게요.”
“아니, 지금 당장 기관삽관 안 하면 돌아가실 것 같다고요.”
“아, 그러면 내일부터 운동도 해 볼게요.”
고환에 욕창이 생길 정도로 고도비만인 환자가 어떻게 운동을 한다는 것일까. 제3자가 보면 만담이었겠지만 나는 속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지금 당장 죽을 수도 있어요! 10분 안에 결정하세요. 인공호흡기 할지 죽을지!” 옆에서 보호자가 추임새처럼 “야, 그래도 살고 봐야지”라고 한 마디 했다. 거의 절반은 윽박질러서 겁먹은 눈길의 환자에게 동의를 얻어냈다. 방금 본 동맥혈검사 결과지가 눈앞에 아른거려 도저히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결국 기관 삽관을 하고 인공호흡기를 연결했다. 그럼에도 처참했다. PEEP(호기말양압)을 아무리 세게 걸고 산소포화도를 아무리 올려도 호흡 산증 개선이 되질 않았다. 이쯤 되니 덜컥 겁이 나서, 곧바로 2년 만에 속편을 찍게 될 운명에 처한 호흡기내과 중환자 담당 교수님께 연락했다.
“교수님. OO(환자 이름)이 왔습니다.”
연락을 받은 교수님의 대답은 간단했다. “몇 킬로야?”
“최소 180kg는 되는 것 같습니다.”
잠시간의 정적 속에서 나는 머리를 싸매고 고뇌하는 교수님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입원시켜. 그리고 처방창에 별표 여러 개 치고 써놔. TPN(정맥영양) 절대 금지.”
그렇다. 환자의 호흡곤란의 원인은 바로 비만이다. 치료는? 다이어트이다. 살을 빼서 흉곽을 누르는 질량을 제거한다면 증상은 호전될 것이다. 살을 빼려면 영양공급을 하지 않으면 될 것이고. 허나 아무리 빠른 다이어트라 한들 단시간 안에는 불가능했고 환자는 지금 당장 응급 처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열나니까 CT 찍고, 고환에 생긴 욕창인지 농양인지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도 확인해야 하니까. 진정제도 쓰고…”
그렇게 교수님의 오더를 하나하나 착실하게 해결하고 있는데, 앞에서 웬 전화를 받더니 응급의학과 전공의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그가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선생님, CT 통에 끼어서 환자가 안 들어갑니다. 제가 이런 경우는 처음 봤습니다.”
응급의학과 전공의는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내 얼굴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교수님에게 나쁜 소식 전하기를 하니 탄식과 함께 “아니, 코끼리도 CT찍는 세상이잖아!”라는 절규가 이어졌다.
“교수님. 그건 코끼리용 CT를 쓰는 겁니다. 저희 병원 CT 는 사람 전용입니다.”
“그래…일단 입원 시키고, 에크모도 생각을 해봐야겠네.”
그렇게 환자는 2년 만에 중환자실에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전임 주치의가 했었을 법한 숱한 고민들을 그날부터 그대로 다시 하게 되었다. 하나같이 말 그대로 답이 안 나오는 고민들이었다. 인공호흡기를 달면 환자와 호흡기의 리듬을 일치시켜야 했다. 그래야 설정한 값대로 기계환기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환자를 재워서 자발호흡을 없애야 하니 진정제를 투여했다. 몸무게가 몸무게니만큼 투여되는 진정제의 양도 어마어마했다.
문제는 그날 아침에 일어났다. 교수님은 중환자실에 오자마자 곧바로 그 환자부터 보러 갔다. 그런데 당연히 깊은 잠에 들었어야 할 환자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 교수님을 바라보더니 인공호흡기를 낀 상태로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하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교수님은 어이가 없다 못해 혼이 가출한 표정을 하고 계셨다. 그러면서도 오더는 잊지 않으셨다. “프로포폴도 달아.” 그렇게 진정제인 미다졸람, 프로포폴이 가능한 최대 용량으로 투여되었지만, 변화는 없었다. 환자는 여전히 말똥말똥 눈을 뜨고 거침없이 숨을 쉬고 있었다.
이어 흉부외과 교수님도 도착했다. 눈빛이 매우 착잡해 보였다. 필시 의국에 걸려 있는 사진과 침상에 누워 있는 환자를 비교하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뭐라 따질 겨를이 없었다. 굵다란 에크모 관이 다시 혈관을 통해 들어가고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환자가 지나치게 비만이다 보니 에크모 관이 밀려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 굵은 관이 밀려 나오니 자연스레 피가 줄줄 샜다. 아침저녁으로 혈색소수치가 1씩 떨어져서 끊임없이 수혈이 들어갔다. 흉부외과에서는 최소 하루 여덟 번씩 와서 에크모 관을 다시 밀어 넣고 봉합을 하고를 반복했다. 문제는 흉부외과는 당직 전공의가 없으니 교수 본인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야. 나 일주일에 열 시간도 못 잤다.” 절반쯤 시체가 되어버린 흉부외과 교수님이 비척거리며 남기신 유언 같은 말이었다.
주치의라고 다를 것이 있겠는가? 교수님께서는 이 환자에 집중하라고 평소에 열 명 보던 환자를 한 명으로 줄여주셨다. 그러나 아무리 약을 퍼부어도 자지 않고, 에크모는 밀려 나오고, 시도 때도 없이 기계장치 알람이 울리는 환자 앞에서 주치의의 선택지는 몇 개 없었다. 그저 현상 유지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환자의 살이 빠지고, 자연스레 회복하도록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모두의 정신을 쏙 빼놓으며 한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일반적으로 기관삽관을 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기관절개술을 고려한다. 입이 아니라 목으로 관을 넣는 것이다. 관의 길이가 짧을수록 기계환기에서 이탈하기가 용이하고, 폐렴 가능성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헌데 이 환자는 목이 짧고, 살집도 두터운데다, 이미 기관절개술을 했던 기왕력이 있다. 그야말로 삼중고인 것이다. 그래서 만반의 준비를 거쳤다.
목 CT도 찍고 (140kg 정도가 되면 CT 통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그때 또 처음 알았다) 전신마취 하에 이비인후과 수석 전공의가 집도하기로 하였다. 기관절개술은 보통 20~30분 안에 끝나는, 이비인후과 저년차가 집도하는 간단한 술기이지만, 그날만큼은 예외였다. 나는 수술실로 에크모 기계와 함께 이동하는 환자를 보고, 제발 별 일이 없기를 빌었다.
환자가 다시 중환자실로 돌아온 것은 무려 두 시간 후였다. 같이 온 이비인후과 수석 전공의의 숨은 거칠었고 온 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넋이 나간 그에게 듣자하니 수술실에서 마취과가 아무리 가스를 먹여도 마취가 잘 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근이완제를 주었는데도 환자가 계속 움직였다. 도저히 수술 진행이 불가능했다.
이비인후과 수석 전공의는 칼날 위를 걷는 기분으로 상관인 두경부외과 교수님을 호출했다. 마취과에서도 경험 많은 노교수님을 호출했다. 두 교수의 노력에도 불구 환자는 계속 움직이고 움직일 때마다 목에서는 피가 튀었다. 겨우 수술을 끝내고 중환자실로 돌아왔을 때 이미 환자는 두 과의 악몽이 되어 있었다.
“저희 이 환자 기관절개 한 곳 절대 안 닫아줍니다. 내가 면허 걸고 기관절개술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한번 닫으면 다시는 못 엽니다.”
한숨을 푹푹 내쉰 이비인후과 전공의는 중환자실을 떠났다. 떠나기 직전, 결의에 찬 표정으로 돌아보며 한 번 더 강조한 것은 덤이다.
“진짜 못 합니다!”
다행히도 그 사건을 뒤로 하고 환자는 회복 추세에 들어갔다. 기계호흡기를 천천히 이탈하고, 에크모도 완전히 뗄 수 있었다. 환자에게 있어서는 똑같은 경험을 두 번 한 셈이다. 심지어 퇴실 때의 몸무게도 비슷하다고, 교수님이 한 마디 했다.
나는 중환자실 담당이었기에, 환자가 병동으로 전실되며 주치의도 바뀌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전(前) 주치의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정확히는 끓어오르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환자를 자주 보러 갔다. 퇴원 전날에도 일부러 챙겨 갈 정도였다. 재활치료를 받은 환자는 혈색도 몸짓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다만 이전 주치의도 똑같은 모습을 봤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냥 기뻐하며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환자분. 다시 살쪄서 오시면 목숨 삼진 아웃이에요.”
“알겠습니다, 선생님.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기관절개술 자리에 낀 코켄 튜브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는 다소 거칠었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순박하기 짝이 없는 눈동자와 어린애 같은 미소를 보니 더 다그쳐야 할지 따뜻한 말이라도 건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다음 날, 그는 한 차례의 요란한 기념촬영 후 다시 병원을 떠났다. 여러 사람들의 인생 환자 기록을 한 번 더 갱신하며 말이다.
병원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간다. 나는 중환자실에서 다른 분과로 소속이 옮겨지고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다지 큰 차이 없는 일상이다. 달라진 것은, 흉부외과 의국에 걸려 있는 사진이 2장이 되었다는 것과, 중환자실에 놓인 교수님의 청진기 통에 붙어 있는 <OOO 교수님 청진기> 라는 무미건조한 포스트잇 옆에, 삐뚤삐뚤한 글씨가 담긴 감사 편지가 하나 붙었다는 것 정도이다.
그가 잘 살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도 배달 음식을 시킬 때마다 문득 그가 생각난다, 언젠가 그와 마주치기를. 살을 쭉 빼고 천진난만한 미소를 입에 건, 라이더가 된 그와 마주하기를, 아주 약간 바라는 마음은 있다.
내과 전공의 생활이 끝나가는 이 시점에, 힘들다면 힘든 3년 동안 큰 힘이 되었던 것은 같이 고생한 동기들의 존재, 그리고 서로 함께 고민하며 환자를 살리려고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얻은 보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역시 인생 환자 한 명쯤은 생기게 마련이고, 환자를 보는 과정에서 생긴 지식과 경험들을 동료들과 같이 나누고 하나씩 더 배우면서 더 나은 의사가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경험들 중 주변 사람들이 가장 좋아했던 이야기를 좀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 한미수필문학상에 투고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에서 한 번도 보기 쉽지 않을 중환자 사례라 그 자체도 흥미로웠지만, 그 환자를 통해 생긴 에피소드만 나열해도 그 때를 떠올리며 지금도 저는 아련한 마음이 듭니다. 제게는 너무나 인상적이었던 한 달이었는지라, 기나긴 의학의 역사에 감히 제가 작은 점 하나정도는 남기고 싶었습니다. 글을 쓰면서 가장 힘든 것이 정말 즐거웠던 한 달을 몇 장으로 줄이는 것일 정도였으니까요.
다시 오지 않을 전공의 생활, 그 중에서도 열정에 불탔던 때를 기록할 수 있게 해 주신 청년의사와 한미약품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힘든 전공의 생활을 지나 앞으로 내과 의사로서도 같이 함께해줄 내과 동기들, 지금까지 더 나은 의사가 될 수 있도록 지도해주신 교수님들과, 언제나 제 편이 되어주시는 가족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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