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 다큐 〈휴먼 크로니클〉, 내레이션 대신 현장 소리
세브란스병원 1년여 밀착 취재…다양한 모습 담아내
“봉쇄 수도원 떠오르는 대학병원…의료, 헌신만으론 안돼”
인간의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이 펼쳐지는 대학병원을 무대로 한 의학 다큐멘터리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 공개되면서 주목 받았다. 의학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실사판이라는 평가를 받는 〈휴먼 크로니클〉이다.
휴먼 크로니클은 ‘푸드멘터리’(푸드+다큐멘터리)라는 새로운 다큐 장르의 지평을 연 이욱정 PD 작품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빅5병원 중 한 곳인 세브란스병원을 무대로, 그 안에 있는 구성원을 주인공으로 다룬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 1년여간 환자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의료진과 그간 접하기 어려웠던 영양팀, 시설관리팀 등 지원부서, 또 촬영 금기 공간이었던 해부학교실까지 병원 전체를 그대로 담아낸 점도 휴먼 크로니클이 주목 받는 이유다.
휴먼 크로니클을 탄생시킨 이 PD를 만나 제작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 PD는 ‘누들로드’로 제36회 한국방송대상 작품상 부분에서 대상을, ‘요리인류’로 제51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교양 작품상을 수상한 요리 다큐멘터리의 개척자다.
지난 20여년 간 몸담았던 KBS를 떠나 '마인드앳플레이' 대표로 인간 사회의 다양한 조직들을 인류학적으로 관찰한 ‘크로니클’(연대기)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휴먼 크로니클은 푸드 크로니클에 이은 두 번째 시리즈로, OTT ‘티빙’(Tving)에 처음 공개됐다.
- 크로니클 시리즈로 ‘병원’을 택한 이유가 있나.
음식을 테마로 한 프로그램도 많이 제작했지만 의료에 대한 프로그램도 꽤 했다. ‘추적 60분’을 제작하며 의료 이슈들을 지속적으로 취재했다. 의약분업이나 당뇨대란 등 의료계 여러 이슈들을 다뤘고, 암 환자들이나 거인증 등 희귀질환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며 의료 영역에 대한 관심은 갖고 있었다. 오늘날 현대사회를 움직이는 중추적인 기관을 밀착 취지해 들여다보는 장기 프로젝트가 크로니클 시리즈다. 첫 번째로 생각했던 곳이 '종합병원'이었다.
- 세브란스병원을 선택한 이유도 궁금하다.
역사도 가장 오래됐고, 최정상에 올라 있는 의료기관이기도 하다. 특히 세브란스병원은 기독교 정신에 의해 세워진 곳이다. 20살 남짓 의과대학에 입학해 65세 정년에 이를 때까지 평생을 신촌에서 보내는 의사들을 보며 봉쇄 수도원이 떠올랐다. 또 이런 독특한 문화나 환경 속에 있는 병원은 드물 거라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는 세브란스병원에서 태어났고 연세대 출신이다(웃음).
- 1년 가까이 밀착취재를 했다고 들었다. 코로나19 시기 취재가 쉽지 않았을 텐데.
휴먼 크로니클을 기획한 건 2년 전이다. 당시 코로나19 환자가 급격히 늘어날 때였다. 촬영 시작이 늦춰졌고 2022년 상반기 겨우 시작했다. 촬영팀이 병원에서 당직을 하다시피 1년여를 지냈다. 현실적으로 코로나19라는 예상치 못한 큰 장애가 있었고 병원이라는 곳 자체가 환자의 프라이버시 문제가 민감한 곳이라 어려운 점도 많았다. 제작비도 한국콘텐츠진흥원에 공모를 한 게 당선돼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미션 임파서블’이다. 촬영장에 PD만 10명이 투입됐고 베테랑 촬영 감독들이 투입됐다. 카메라 기종도 대형 프로젝트에 사용되는 장비들을 사용했다. 노동 강도가 엄청난 프로젝트였다. 또 의사들이 콜을 받으면 언제든지 가는 것처럼 촬영팀도 비상 대기를 해야 했다. 코로나19로 수술장에 들어갈 때면 소독도 해야 했고, 장비도 렌즈만 남겨두고 모두 비닐로 감싸는 등 철저히 했다.
- 종합병원을 무대로 한 의학 드라마는 많다. ‘이런’ 의학 다큐멘터리는 처음이다. 제작할 때 어떤 점을 중점에 뒀나.
기획할 때 두 가지를 목표로 정했다. 보통 휴먼 다큐멘터리라고 하면 감성적인 요소가 많은데 그러지 말자고 했다. '종합병원'이라는 소우주를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관찰하자는 거였다. 이곳을 거쳐 가는 의료인들과 환자들은 어떻게 보면 조연이고 진짜 주인공은 세브란스병원이라는 생각을 했다. 휴먼 크로니클 중간에 보면 아무 말 없이 병원의 여러 풍경들을 보여주는 드론 샷이 그런 것들을 나타내는 장면이다.
또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걸리기도 하고 고통 받고, 관심 갖는 질환들을 다뤄보고 전문적인 수준의 의학정보를 그 안에 녹여보자고 생각했다. 사실 이 둘을 한 바구니에 담기는 쉽지 않았다.
- 이식외과와 심장내과, 간담췌외과, 신경외과, 산부인과 등 최근 필수의료과로 주목 받는 곳들이 집중 조명됐다. 진료과목 선정 시 고려한 부분도 있었나.
기획·준비 단계에서 가장 핵심적인 이슈였다. 우선 ‘서전(surgeon)’이라는 외과의사에 초점을 맞췄다. 가장 다이내믹한 의료현장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아주 오래전 의약분업을 취재하며 ‘의료 왜곡’이라는 문제에 눈을 떴다. 해외에서 우리나라를 의료 선진국이라고 부른다. 우리 생명과 직결된 필수 진료과 의료진을 보면 높은 난도의 술기를 배우기 위해 많은 트레이닝이 필요하다. 하지만 20년 전인 의약분업 때도 우리나라 의료보험 체계 안에서 의료가 왜곡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고 지금은 더 심각해진 것 같다. 때문에 의료인들이 정말 고군분투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휴먼 크로니클을 보면서 시청자들도 의료 개혁이라는 부분에 대해 인지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이렇게 가다가는 아주 중요한 분야의 인재들이 지속적으로 양성되지 못하는 상황들도 벌어질 수 있겠구나', 그런 것들이 전달됐으면 한다.
- 다른 다큐멘터리에는 있지만 휴먼 크로니클에 없는 게 있다고 들었다.
내레이션이다. 수많은 현장의 음성을 이어 이야기를 만들어야 해서 어려웠지만 그렇기 때문에 제작자들의 판단이나 의도보다는 현장의 목소리를 그대로 담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연세의료원 차원에서도 세브란스병원의 ‘영상 아카이빙’이 만들어진 것이다.
- 총 6부작으로 편성됐다. 1년여 동안 밀착취재하며 담지 못해 아쉬웠던 부분은 없었나. 휴먼 크로니클에 출연한 의료진 섭외는 어떤 기준으로 했는지도 궁금하다.
1년여 시간을 찍었다. 그 사람의 민낯이 나올 수밖에 없다. 더욱이 스트레스가 많은 상황 아닌가. 다른 의료진이나 환자들에게도 드러나고 보여 질 수밖에 없다. 이 시리즈를 하면서 던지고 싶은 질문은 그거였다. 병원은 어떤 곳인가, 의사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인가,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우리가 잊고 사는 건 아닌가. 그런 면에서 다큐에 출연한 분들은 ‘진정한 의사가 뭘까’를 보여준다. 봉쇄 수도원과 연결이 된다고 생각했던 점도 이 때문이다. 봉쇄 수도원은 속세와 단절되지만 가장 큰 가치를 놓치지 않고 꾸준히 일상 속에서 실현하려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처럼 적게 일하고 편하게 지내는 게 인생의 최고 가치가 되는 세상에서 그런 일을 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대학병원 의사들은 어떻게 보면 과학자이면서, 테크니션이고, 장인이면서 감정 노동자다. 사람과 소통하고 그 사람이 가장 바닥에 있는 약한 존재일 때 희망을 주고 구해내는 역할을 한다. 요즘 의사에 대한 시선이 있다. 한국 사회는 전문가에 대해 정당한 평가에 인색한 면도 있다. 그런데 어떤 한 사람의 무한정한 헌신만 갖고 제도가 유지될 수는 없다. 그런 점을 휴먼 크로니클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