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법 “이중개설병원 급여비 환수 부당” 판결 파장

이중개설금지법(反유디치과법)으로 불리는 의료법 제33조 8항 때문에 문을 닫는 의료기관들이 늘고 있다. 경기도 의정부시에서 재활병원으로 이름을 알린 L병원, 서울시 도봉구에서 선진국형 요양서비스 제공을 목적으로 개설·운영됐던 S병원이 대표적이다. 이들 의료기관이 폐업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요양급여비 지급 중단 및 환수 처분 때문이다.

공단이 이중개설금지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는 의료기관에 대해 급여비 지급을 중단하고 이미 지급된 급여비도 환수하겠다고 나서면서 자금 조달이 힘들어진 의료기관들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L병원의 경우 법원이 이중개설 의료기관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지만 이미 폐업한 뒤였다.


그런데 공단의 이같은 조치가 위법하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이중개설된 의료기관이라고 하더라도 급여비는 지급해야 한다는 것으로, 공단의 환수 조치에 제동이 걸린 셈이다. 이중개설금지법 위반 혐의로 처음(2014년 4월) 기소된 T병원이 공단을 대상으로 제기한 요양급여비 환수 처분 취소 소송에서다.

T병원은 지난 2008년 안산점을 시작으로 일산, 대전, 대구 등에 네트워크병원을 개설해 운영해 왔다. 당시에는 합법적으로 개설된 의료기관들이었지만 지난 2012년 2월 의료법이 개정(33조 8항)되고 유예기간 6개월을 거쳐 그해 8월부터 개정된 법이 시행되면서 한 순간에 ‘불법 의료기관’으로 전락했다.

공단은 T병원이 이중개설금지법 위반 혐의로 적발되자 법 시행 이후 지급된 요양급여비를 즉각 환수 조치했다. 공단이 T병원 안산점 등 4곳에서 환수한 요양급여비는 230억5,000만원이었으며, 안산점에 대해서만 75억원(2012년 8월~2013년 12월) 가까이 환수 조치됐다.

T병원 안산점은 공단의 요양급여비 환수 조치가 부당하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1심에서는 패소했지만 2심 판결은 달랐다. 2심부터 원고보조참가인 자격으로 참여한 법무법인 세승은 이중개설된 의료기관이라고 하더라도 행정기관 허가를 받아 개설된 곳으로 요양기관 당연지정제 하에서는 급여비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 건강보험법상 환수 대상은 의료행위 자체가 부적절한 경우로, 이중개설 의료기관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2심 재판부는 이같은 주장을 대부분 수용했다.

“이중개설 병원이라도 급여비 수급 자격 있다”


서울고등법원 제2행정부는 지난달 23일 이중개설된 의료기관이라고 하더라도 요양급여비 수급 자격이 있다며 T병원 안산점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이중개설금지법을 위반한 의료기관이라고 해도 그 안에서 이뤄진 의료행위가 정당하다면 그 대가인 요양급여비를 받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공단은 의료법 제33조 8항이 시행된 지난 2012년 8월부터 T병원 안산점은 ‘의료법에 따라 개설된 의료기관’으로 볼 수 없어 요양기관 자격도 잃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이 병원은 건강보험법 42조(요양기관) 1항 1호 소정의 ‘의료법에 따라 개설된 의료기관’으로서 급여비 수급자격이 있는 요양기관에 해당한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며 “피고(공단)는 의료법에 따라 적법하게 설립된 의료기관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나 그렇게 해석할 경우 의료법 36조에 정한 시설 기준 중 경미한 위반행위가 있음을 간과하고 행정청이 의료기관 개설허가를 한 경우까지 모두 무효라고 보게 돼 요양기관 범위가 지나치게 축소되며 요양기관 당연지정제 취지에 반하는 결과가 초래된다”고 지적했다. “그런 하자를 모르고 의료기관이 요양급여를 한 경우까지 그 비용을 받을 수 없는 결과가 돼서 의료기관에게 지나치게 가혹하다”고도 했다.

법원은 공단이 이중개설 의료기관의 의료기관 자격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는 점도 지적했다. 현행법상 이중개설된 의료기관에 대해 개설허가 취소 등 처벌 규정이 없다. 다만, 이중개설금지 조항(33조 8항)을 위반한 의료인에 대해 5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 벌금형에 처하고 면허자격정지 3개월의 행정처분을 내릴 수 있다.

재판부는 “이 병원은 2008년 1월 31일 안산시장에 의해 적법하게 의료기관 개설 허가가 났고 그 후 원고 등의 명의로 적법하게 명의인 변경허가가 이뤄졌으며 의료법 33조 4항, 7항에 따른 시설기준을 모두 갖추고 있다”며 “안산시장의 허가에 당연무효의 사유가 있다고 할 수 없으며 요양급여비를 수령할 수 있는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행정처분이므로 그 처분에 공정력이 인정돼 제3자인 피고(공단)가 이 사건 병원 개설의 효력을 다투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구 의료법에 의해 적법하게 개설허가를 받은 의료기관이 조항 신설로 무허가 의료기관이 된다거나 행정청이 이를 이유로 기존의 허가를 취소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공단의 급여비 지급 정지, 엄격하게 해석돼야”


의료법상 위법인 이중개설과 건강보험법상 부정 청구는 구분돼야 한다고도 했다. 이중개설된 의료기관이라고 하더라도 요양기관으로서 요양급여비를 청구하고 받을 자격이 있다는 판단이다.

재판부는 “건강보험법은 부정한 방법으로 보험급여를 수령한 자에 대한 형사책임을 규정하고 있는데 부정수급죄가 성립하는 범위도 보험급여 대상이 되지 않는 진료행위에 대해 급여비를 받거나 당해 진료행위에 교부돼야 할 금액을 초과해 받는 경우로 해석될 뿐”이라며 “요양기관의 개설과 관련해 반사회성이 크지 않은 위법이 있었으나 유효한 진료행위가 실제 있었던 경우까지 이를 포함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단순히 이중개설 금지 규정을 위반했다는 사정만으로 건강보험법상 ‘거짓이나 그 밖의 부정한 방법’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요양기관 당연지정제 하에서 공단의 요양급여비 지급 정지 및 환수는 엄격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재판부는 “요양기관이 환자와 진료계약을 체결하고 보험진료를 행하면 피고(공단)의 지급 결정 등을 요하지 않고 곧바로 요양급여비 채권은 발생한다”며 “당연지정제는 국민의 의료보험 수급권을 보장하기 위해 의료기관의 재산권 및 직업행사의 자유를 일정 부분 제한하는 것이므로 요양급여가 이뤄졌음에도 그 비용을 지급하지 않는 경우는 비교적 엄격하게 해석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의료인이 의료기관을 중복 개설·운영했더라도 국민에게 정당한 요양급여가 이뤄진 것으로 평가된다면 원칙적으로 그 비용을 지급하는 것이 당연지정제 취지에 부합하고 법익의 균형에도 맞다”고 했다.

“네트워크병원과 사무장병원은 다르다”

공단은 ‘네크워크병원’과 ‘사무장병원’을 동일선상에 놓고 요양급여비 환수 처분 등을 내리고 있지만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이중개설 의료기관인 네크워크병원과 비의료인에 의해 개설된 사무장병원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봤다. 네트워크병원이 반사회적이거나 건강보험체계를 교란시키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도 했다.

재판부는 “의료법 위반 행위가 건강보험법상 ‘속임수나 그 밖의 부당한 방법으로 보헙급여비를 받는 경우’에 해당하기 위해서는 의료법 위반행위가 반사회적이거나 그에 준할 정도로 보호가치가 없는 행위로 보험체계를 교란시키는 정도에 해당해야 한다”며 “의료법상 의료기관 복수 개설·운영에 대한 제재 처분이 가능한데도 보험체계를 교란시키지 않은 의료법 위반행위를 속임수나 그 밖의 부당한 방법으로 보험급여비용을 받은 경우에 포함시켜 환수처분을 통해 이를 제재하려는 것은 과다한 규제가 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사무장병원(의료법 33조 2항 위반)에 대해서는 건강보험법상 요양급여비 지급을 보류(47조의 2)하거나 개설자 연대 징수 규정(57조 2항 1호)을 두고 있는 반면 이중개설 의료기관(의료법 33조 8항 위반)에 대해서는 관련 규정이 없다며 “건강보험법도 의료인이 복수의 병원을 개설하는 경우의 불법성을 사무장병원의 불법성과 달리 평가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피고(공단)는 사무장병원이든 네크워크병원이든 형식적으로 명의를 대여한 의료인에 의해 의료가 이뤄진다는 면에서 질적인 차이가 없으며 오히려 네트워크병원은 두 개의 요양기관이 개설·운영되므로 영리성이 높아 사회적 비난 가능성이 더 높다고 주장하지만 법률 자체가 양자의 불법성을 달리 평가하고 있다”며 “사무장병원과 네트워크병원은 본질적 차이가 있다”고 강조했다.




환수처분으로 이중개설금지법 이해관계자된 공단

이같은 법원 판결이 나오자 이중개설 의료기관에 대한 공단의 무작위 환수 조치에 제동이 걸릴지 의료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건강보험 진료를 주로 하는 의료기관들에게 공단의 요양급여비 지급 정지 및 환수 조치는 치명타를 입힐 수 있다. 실제로 이중개설 의료기관으로 의심받았던 L재활병원은 이중개설 의료기관이 아니라는 법원 판결을 받았지만 경찰 조사 단계에서 공단이 요양급여비 지급을 정지하면서 경영난에 직면, 결국 폐업했다.

L병원 원장 K씨는 “검찰이 기소도 하지 않았고 유죄 판결도 나지 않았는데 공단이 왜 요양급여비 지급을 중단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지급 거부를 미뤄달라고 했을 때 공단 측에서는 자기들이 받아야 하는 돈이 100억원 가까이 되는데, 지급 거부를 통해 일부의 채권을 확보해 놓는 거라고 하더라. 그러면서 의사들에게 나중에 환수 처분을 내려봤자 재산을 은닉해 놓기 때문에 받을 길이 없다고 했다”고 전했다. K씨는 “아직 판결이 나지도 않았는데 나는 100억원을 빚진 사람이고 재산을 은닉할 사람이 됐더라”며 “법치국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법무법인 세승 김주성 변호사는 “법원은 네트워크병원이 건강보험체제를 교란시키지 않는다고 봤다. 공단 주장과 달리 사무장병원과 네트워크병원은 전혀 차원이 다르다”며 “이중개설금지 관련 의료법이 개정됐을 때 공단은 이해관계자가 아니었지만 요양급여비 환수 처분을 내리면서 이해관계자로 부상했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사무장병원은 의료 질서 안에서 허용될 수 없지만 의료인이 개설한 네트워크병원은 다르다”며 “의료인에 의해 개설되고 의료인에 의해 이뤄진 정당한 진료 행위에 대한 대가를 청구하는 것은 위법하지 않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라고 강조했다.

법무법인 지평 김성수 변호사는 “향후 의료인의 이중개설금지 규정 위반 행위에 대해서는 의료법상 형사처벌이나 의사면허자격 정지 등 제재는 유지할 수 있으나 요양급여비 지급 정지나 환수 처분을 하기 위해서는 별도 요양기관 자격 상실이나 의료기관 개설 취소 등의 처분을 한 후에 시행돼야 한다”며 “이번 판결은 이중개설금지 규정 자체는 입법론이나 헌법상 문제가 없다고 보면서도 현행 의료법과 건강보험법 규정과 입법 연혁을 체계적으로 고찰해 합리적인 분쟁해결의 기준을 세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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