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길리어드사이언스코리아 최재연 대표
트로델비 급여부터 국제 공동심사까지 '접근성 혁신' 전략 공개
"혁신 신약은 환자에게 도달해야 비로소 의미가 있습니다."
취임 2년 차를 맞은 길리어드사이언스코리아 최재연 대표는 인터뷰 내내 '환자 중심 접근성'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올해 1월, 삼중음성 유방암(TNBC) 치료제 '트로델비(성분명 사시투주맙고비테칸)'가 국내 건강보험 급여를 받으며 ICER(Incremental Cost-Effectiveness Ratio) 기준이 유연 적용된 첫 사례가 만들어졌다. 최 대표는 이를 두고 "단순한 약가 협상 결과가 아닌 제도 개선의 출발점"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최 대표는 "2030년 WHO가 제시한 C형간염 퇴치 목표에 한국이 실질적으로 기여할 것"이라며, HIV 예방 효과 99%의 장기 지속형 PrEP 주사제 국내 도입 계획도 밝혔다. 그는 더 나아가, 신속 심사를 위한 '국제 공동심사 프로그램(Project Orbis, AST)' 참여와 환자 중심 성과 지표 도입 등을 정부에 제안했다.
트로델비 급여, 제도 혁신의 물꼬를 트다
삼중음성 유방암(TNBC)은 전체 유방암 환자의 약 15%를 차지하며, 주로 40~50대의 비교적 젊은 여성에게 발병한다. 호르몬 수용체와 HER2 단백질이 모두 음성이어서, 기존 표적치료제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치료 옵션은 제한적이고, 재발률은 높으며, 예후도 나쁘다. 최 대표는 "이 질환군은 치료 선택지가 거의 없어 미충족 수요가 절박한 분야였다"고 설명했다.
트로델비는 바로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등장했다. 혁신적인 항체-약물 접합체(ADC) 치료제로, 기존 치료요법 대비 생존기간을 유의미하게 연장한 임상 데이터를 확보했지만, 국내 급여 등재까지는 험난한 길이 예상됐다. 기존 약가 제도에서는 혁신성을 인정받아도 ICER 적용값의 한계로 인해 비용효과성을 인정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업계 안팎에서는 "좋은 약이지만, 현 제도에서는 급여까지 가기 어렵다"는 시각이 우세했다.
"이번 급여 결정은 트로델비의 임상적 가치를 인정받아 ICER 기준을 유연하게 적용한 첫 사례입니다. 제도적으로도 매우 이례적인 결정이었고,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최 대표는 이를 "정부, 의료진, 환자단체, 언론이 함께 만들어낸 제도적 혁신"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트로델비 급여 과정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며 "특히 환자단체의 목소리는 절박했고, 언론은 이를 진정성 있게 전달하는 다리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환자의 현실과 목소리가 정책 결정자에게 정확히 전달됐다는 점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환자 중심 협력'이 실제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번 사례는 단순히 한 치료제의 급여 등재를 넘어, 혁신 신약이 기존 제도의 한계를 넘어 환자 손에 더 빨리 닿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최 대표 역시 "트로델비 급여 결정은 앞으로 혁신 치료제의 조기 접근성을 위한 제도 개선 논의의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C형간염 완치와 B형간염 조기 치료 확대
길리어드는 항바이러스 분야에서 '게임 체인저'로 불린다. 2013년, 길리어드는 첫 번째 경구용 C형간염 치료제를 출시한 이후 불과 4년 만에 4종의 혁신 치료제를 시장에 내놓으며 C형간염 완치율을 최대 99%까지 끌어올렸다. 과거에는 주사 치료와 복잡한 병용요법, 낮은 치료 성공률이 환자와 의료진 모두에게 부담이었지만, 길리어드의 약물은 복용 기간과 부작용을 획기적으로 줄이며 C형간염의 치료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특히, 모든 유전자형에 효과적인 '엡클루사(성분명 소포스부비르/벨파타스비르)'의 등장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최 대표는 이를 "질환 종식 가능성을 실질적으로 입증한 전환점"이라고 표현했다.
"C형간염은 조기 진단과 치료만 이뤄지면 완치가 가능합니다. WHO가 제시한 2030년 퇴치 목표는 결코 먼 얘기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여전히 진단과 치료의 '사이'에서 환자를 놓치고 있습니다. 진단율을 높이고, 치료 접근성을 보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간경변이나 간암으로의 진행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의 말에는 환자 현장의 긴박함이 담겨 있었다. 실제 C형간염은 초기 증상이 거의 없어 감염 사실을 모른 채 수년간 방치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이미 간 손상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일 수 있다. 최 대표는 "제도적 장벽을 낮추고 검사와 치료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제약사가 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공중보건 기여"라고 강조했다.
B형간염에서도 그는 조기 개입의 필요성을 거듭 언급했다.
"기존 치료 가이드라인보다 더 이른 시점에 치료를 시작하면 사망률을 크게 낮출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정부가 관련 논의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과학적 근거가 정책 변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길리어드의 전략은 단순한 신약 개발·판매에 그치지 않는다. 최 대표는 이를 "완치를 향한 과학 혁신"이라 정의하며, "C형간염에서 완치를 실현한 경험을 토대로 이제는 B형 간염에서도 조기 치료를 통해 ‘완치에 가까운 상태’로 환자를 이끄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강조했다.
"환자가 병을 키우지 않고도 평생의 건강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지난 10년간 배운 교훈이자 앞으로 10년간 가야 할 길입니다."
연 2회 주사로 HIV 예방 99% 효과, 국내 도입 눈앞에
항바이러스제 분야에서 길리어드가 이뤄낸 기술 혁신은 이뿐만이 아니다. 최근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승인한 연 2회 투여 장기 지속형 PrEP 주사제는 매일 약을 복용해야 하는 기존 경구제와 달리, 반년에 한 번만 주사를 맞으면 되기 때문에 복약 순응도 문제를 크게 줄일 수 있다. HIV 감염 고위험군에게는 투약 부담이 획기적으로 완화되는 셈이다.
최 대표는 이 치료제를 "HIV/AIDS를 치명적인 질환에서 관리·예방 가능한 질환으로 전환시키는 전환점"으로 평가했다.
"HIV는 조기 진단과 꾸준한 치료만 이뤄지면 관리 가능한 만성질환이 됩니다. 이제는 거기에 '예방'이라는 확실한 무기를 더하는 단계로 진입했습니다. 이 신약은 예방 효과뿐 아니라, 환자와 의료 현장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꿀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해당 치료제는 현재 국내 도입은 준비 단계다. 최 대표는 "아직 허가 전이지만,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국내 환자들과 고위험군이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하겠다"라며 "길리어드는 단순히 치료제를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예방과 완치를 포함한 전주기 전략을 강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이 치료제 역시 국내에서의 약가 책정이 중요한 변수가 될 전망이다. 최 대표는 "국내 약가 수준은 아직 논의 초기 단계"라며 "중요한 것은 가격만이 아니라 치료 접근성"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길리어드는 2024년 미국 FDA 승인 직후, 약 두 달 만에 120개 중저소득 국가에 복제약 생산을 허용하는 자발적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했다.
"이 결정은 단순한 기부나 사회공헌(CSR) 활동이 아닙니다. 우리가 개발한 혁신 약물이 반드시 필요한 사람에게 닿아야 한다는 철학을 실행한 것입니다. 국내에서도 이와 같은 철학을 기반으로, 정책 환경에 맞춘 현실적인 가격과 접근 전략을 정부와 함께 설계할 계획입니다."
최 대표는 또한 신약 도입과 함께 사회적 낙인 해소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HIV는 의학적으로 관리 가능해졌지만, 여전히 편견과 차별이 치료 접근의 가장 큰 장벽입니다. 장기 지속형 PrEP 도입은 단순한 약제 추가가 아니라, 사회적 인식 개선과도 맞물린 중요한 변화가 될 것입니다."
환자 접근성 단축 방안으로 국제 공동심사 제안
길리어드가 보유한 혁신 신약은 단순한 기술적 성취에 그치지 않는다. 그 가치는 실제 환자에게 얼마나 빨리, 넓게 전달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나 새로운 약이 허가를 받고 급여 체계에 진입하기까지는 각국의 규제 절차와 심사 속도에 따라 시차가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수개월, 혹은 수년의 공백이 생기면, 혁신은 서류 위에만 머무를 뿐 환자 삶을 바꾸지 못한다.
최 대표는 이 지점에서 국제 공동심사의 필요성을 강하게 제기했다. 그는 미국 FDA가 주도하는 '항암제 글로벌 동시 심사 프로그램(Project Orbis)'과 규제기관 간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공유·검토할 수 있는 '클라우드 기반 협업 플랫폼(Accumulus Synergy Training, AST)'을 대표 사례로 꼽았다.
"단일 국가 심사만으로는 혁신 신약의 도입이 늦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Project Orbis처럼 여러 국가가 동일한 임상 데이터를 기반으로 동시에 심사하면, 환자들이 치료 혜택을 받기까지의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한국도 반드시 이 국제 심사 궤도에 올라야 합니다."
최 대표는 "한국은 글로벌 항암제 임상시험의 약 80%를 수행하는 핵심 국가로, 임상 참여 속도도 빠른 편"이라며 "다만 지금은 '개발'과 '허가' 속도 사이에 간극이 있어, 제도적으로 연계만 된다면 우리는 이 격차를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한국이 가진 강점을 강조했다.
이어 최 대표는 AST의 장점도 부각했다. 그는 "AST는 각국 규제기관이 문서가 아니라 '데이터'를 중심으로 실시간 피드백을 주고받을 수 있게 해준다"라며 "이를 통해 정보 비대칭을 해소하고 중복 심사 업무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환자 접근성을 위한 '제도적 가속장치'인 셈이라는 것.
"길리어드가 만든 혁신은 반드시 환자 손에 닿아야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신약을 개발하는 속도만큼이나, 그것을 환자에게 전달하는 속도를 높이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 국제 공동심사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이고 강력한 해법 중 하나입니다."
'환자 중심 성과지표'로 제도 전환도…
현재 국내 건강보험 제도는 신약의 등재 여부를 결정할 때 비용 효율성을 핵심 지표로 삼는다. 약효와 안전성을 입증한 치료제라도, 비용 대비 효과가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급여 적용이 어렵다. 이는 재정 안정성을 위한 불가피한 장치이지만, 혁신 신약의 조기 도입과 환자 접근성을 가로막는 장벽으로도 작용해왔다.
최 대표는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짚으며 "재정 운용 지표를 환자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용뿐 아니라 생존율, 적기 치료 여부, 삶의 질 개선 정도 등 환자 중심 지표를 반영해야 합니다. 글로벌 스탠다드에서는 이미 이런 평가 방식이 정착돼 있습니다. '얼마나 빨리, 얼마나 많은 환자에게 혜택이 돌아가는가'가 제도 설계의 핵심이어야 합니다."
그의 제안은 단순히 지표의 항목을 늘리자는 수준이 아니다. 현재의 비용 효율성 중심 평가 모델에서는, 치료제의 혁신성이나 장기적 사회·경제적 파급효과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환자의 생존 기간이 늘어나고 생산성이 회복되면 장기적으로 국가 의료비와 사회적 비용이 절감될 수 있지만, 현 제도에서는 이런 '미래 가치'가 계산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다.
최 대표는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KRPIA) 허가 이사로 활동하며, 정부와 업계의 논의 과정을 가까이서 경험했다. 그는 "정부와 업계가 협력해 지표를 바꾸면, 신약 도입 지연 문제를 완화할 수 있을 것"이라며 "특히 중증·희귀질환 치료제처럼 환자 생존과 직결된 분야에서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한 환자 중심 지표가 가져올 변화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렸다.
"만약 평가 지표에 '진단 후 치료 시작까지의 평균 소요 시간'이 포함된다면, 모든 제도와 이해관계자가 그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움직이게 됩니다. 이 결과는 곧바로 환자의 생존율과 삶의 질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환자 중심 제도입니다."
'혁신 신약은 환자에게'… 전략의 핵심
최 대표는 인터뷰 말미에도 '접근성'이라는 단어를 거듭 되풀이했다.
"혁신 신약이 아무리 뛰어나도 환자 손에 닿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과학적 혁신을 환자 혜택으로 연결하는 데 집중합니다. 그 연결 고리를 튼튼하게 하는 것이 제약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그가 언급한 '연결 고리'에는 이미 구체적인 성과와 계획이 담겨 있다.
트로델비 급여 사례는 기존 제도의 한계를 뛰어넘어 혁신 신약이 환자에게 더 빨리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증명했다. C형간염 완치와 B형간염 조기 치료 전략은 치료 시기를 앞당겨 환자의 생존율을 높이고, 질병의 장기적 부담을 줄이는 길을 제시했다. 장기 지속형 PrEP 주사제는 HIV 치료와 예방의 경계를 허물며 질환 관리의 새로운 장을 열 준비를 하고 있다.
여기에 국제 공동심사 제안과 환자 중심 성과지표 전환 요구는, 혁신이 환자에게 도달하는 시간을 단축하는 제도적 토대를 만들기 위한 포석이다.
최 대표는 "환자가 더 빨리, 더 넓게, 더 안전하게 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길리어드의 존재 이유로 정의했다. 그리고 이 목표는 단기 과제가 아니라, 회사의 모든 의사결정과 전략이 향하는 장기적 지향점이기도 하다.
"우리가 만드는 약은 실험실에서만 빛나서는 안 됩니다. 그 빛이 환자의 삶을 비추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제약사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우리가 앞으로도 지켜가야 할 원칙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