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혈관질환 후유증 연구 문헌 131편 분석…“신뢰도 떨어져”
인지장애 개선 정도 평가 위해 시행한 ‘IQ 테스트’에 한숨
한양대병원 신경과 김영서 교수 “과학적 근거 마련이 우선 돼야”
정부가 보장성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한 첩약 급여화 시범사업이 시행된 지 7개월이 지났지만 시범사업을 바라보는 의료계의 불안한 시선은 여전하다. 첩약에 대한 근거 부족이 그 불안함의 원인이 되고 있다.
정부는 첩약 급여화 시범사업의 타당성 검증을 위해 진행한 ‘첩약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위한 구축 연구’를 통해 첩약의 안전성과 유효성, 치료의 효과성이 검증됐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에 본지는 연구 보고서에서 ‘체계적 문헌고찰’을 진행했다고 밝힌 질환별 연구 문헌 총 401편을 입수, 정부의 주장대로 첩약의 안전성과 유효성, 치료의 효과성을 판단할 수 있을지 짚어봤다.
‘첩약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위한 기반 구축 연구’의 참고 문헌은 윤일규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비서관이었던 김현지(서울대병원 권역응급의료센터 내과) 진료교수가 입수해 분석했다.
이를 토대로 본지는 시범사업 대상으로 꼽힌 3개 질환 중 우선 최종 보고서에서 첩약 치료의 임상적 근거가 있다고 제시된 ‘뇌혈관 질환’에 대해 전문가 의견을 들었다.
‘안면신경마비’에 대한 체계적 문헌고찰은 보고서에 실리지 않았으며, ‘월경통’은 후속기사에서 다룰 예정이다.
첩약의 안전성과 유효성·치료 효과성 검증
뇌혈관질환 후유증에 관한 연구 문헌은 전체 401편 중 131편으로 체계적 문헌고찰이 가장 많이 이뤄진 분야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양대병원 신경과 김영서 교수는 한 마디로 “대부분의 연구가 큰 의미는 없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연구자가 연구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비뚤림(Bias)’을 파악하고 최대한 배제해 연구를 수행해야 하지만,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한 채 편향에 치우친 연구가 대부분이라는 지적이다.
뇌혈관질환 후유증에 대한 연구 문헌 131편 중 118편이 환자대조군연구로 이뤄졌으며, 이 중 SCI(Science Citation Index)에 등재된 논문은 4개로 SCI 등재 논문들의 수준도 높지 않았다.
논문의 파급력을 평가하는 임팩트 팩터(Impact Factor)는 최저 0.13부터 최고 2.94였다.
환자대조군연구보다 상대적으로 첩약의 유효성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무작위대조군연구(Randomized Controlled Trial, RCT)는 13편이였으며, 이 중 1편의 IF는 4.18을 기록했지만 환자수와 대조군수가 각각 37명, 33명에 불과했다.
특히 첩약을 복용한 환자군에서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개선효과가 높았다는 연구결과가 도출됐지만, 개선 여부를 평가한 방법에 대한 서술은 없었다.
대표적인 예가 이런 것이다. 국제적 표준이 아닌 중국에서 사용하는 뇌졸중 장애환자의 후유증을 평가하는 툴을 사용해 첩약의 치료성적이 더 우월했다는 결과를 도출했지만, 평가 툴에 대한 설명은 논문들에서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첩약 치료에 따른 인지장애 개선 정도를 평가하기 위해 IQ 테스트를 시행한 연구도 연구 보고서에 포함됐다.
김 교수는 “대부분 환자대조군연구는 의미가 없을 것 같다. 내가 어떤 약에 노출됐는지, 안 됐는지 뻔히 알고 낸 논문이 대부분”이라며 “SCI 논문에 싣지 못한 이유는 결국 엉망이라고 평가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환자군이나 대조군 수를 20명으로 한 게 무슨 통계적인 의미가 있겠냐”며 “20명으로 통계적 차이를 보이려면 첩약 먹은 사람과 안 먹은 사람이 완전히 다른 예후가 나와야 한다. 연구결과대로라면 첩약은 신비의 명약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SCI 등재 논문 중 뇌졸중 환자를 대상으로 운동 기능 및 치료에 대한 효과를 평가하는 ‘푸글마이어 검사(Fugle-Meyer Assessment)’ 척도를 사용하긴 했으나 어떤 방법으로 신경학적 개선을 한 것인지는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약재 안전성 모니터링 ‘전무’…“국민안전 어디에?”
특히 정부가 첩약의 안전성과 유효성, 치료적 효과성을 검증했다고 밝힌 이 보고서에서 안전성 모니터링 자료가 전무하다는 점도 문제로 꼽혔다. 한약재에 대한 상호작용 등에 대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는 안전장치가 반드시 마련돼야 한다는 것.
정부가 첩약의 안전성과 유효성 논란을 잠재우기 위한 장치로 첩약 복용 후 부작용 보고체계를 운영하겠다고 밝혔으나, 전문가들은 좀 더 적극적인 모니터링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작용 보고체계만 운영할 게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첩약 복용 전후 피 검사, 간 기능 검사, 전해질, 콜레스테롤 등의 변화를 측정할 수 있는 검사를 시범사업 기간 동안 추진해야 한다고도 했다.
김 교수는 “안전성 모니터링을 한 자료도 있어야 한다. 논문 131편 중 부작용에 대한 내용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그런 결과도 없이 안전하다고 하면 믿을 수 없는 건 당연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무조건 안전하다고만 할 게 아니라 적어도 부작용이 무엇인지 기본적인 정보는 국민들에게 제공해 줘야 한다”며 “한약재도 간으로 대사되든, 콩팥으로 대사되든 알아야 약으로 인한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고 했다.
한국형 ‘첩약 연구’ 시급…과학적 근거 마련이 우선
한국형 첩약 연구가 시급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뇌졸중질환 후유증에 관한 연구 문헌 131편 모두 중국에서 진행된 이유에서다. 첩약의 안전성과 유효성, 치료의 효과성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과학적 근거가 분명히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뇌졸중의 신경학적 합병증을 개선시킬 수 있는 치료제 개발을 위해 첩약은 아니지만 천연물 성분의 치료물질을 기반으로 한 임상연구가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김 교수는 경희대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을 중심으로 국내 8개 대학병원 신경과에서도 참여할 만큼 의료계에서도 관심이 컸던 연구 사례를 소개했다.
갈근과 황금 등 천연물을 기반으로 한 뇌졸중 치료제 후보물질인 ‘HT047’의 유효성을 탐색하고 안전성을 평가하기 위한 다기관, 위약대조, 이중눈가림, 무작위배정, 평행군 비교, 2상 임상시험으로 푸글마이어 검사 척도를 사용해 환자들의 개선 여부를 평가했다.
연구에는 경희대병원을 비롯해 강동경희대병원, 길병원, 명지병원, 조선대병원, 한림대 동탄성심병원, 한양대구리병원, 한양대병원 등 8곳이 참여했다.
의료계가 천연물을 기반으로 한 치료제 개발에 참여하게 된 배경에는 과학적으로 잘 디자인된 연구에 대한 높은 신뢰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연구에 참여했던 김 교수는 “HT047이라는 물질로 동물실험에서 개선효과가 있다고 해서 환자 RCT에 참여했다”며 “굉장히 객관적으로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뇌졸중 환자들의 신경개선효과를 향상시키기 위해 많은 돈을 투자해 연구를 진행하는데도 전부 실패해 쓸 수 있는 약이 없다”며 “유의미한 결과가 도출되지 않았지만 첩약 연구도 이처럼 논리적이고 과학적 연구가 돼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김 교수는 “첩약이 정말 과학적으로 증명이 돼 전 세계적으로 쓰일 수 있는 약이 됐으면 좋겠다"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과학적인 근거 마련이 우선”이라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