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 수술에 평생을 바쳤는데”…법 밖으로 밀려나는 체외순환사들
[위기의 체외순환사③] 서울대병원 조재희 체외순환사 간호법에 법적 지위 기대했지만 간협 안에 ‘실망’ “체외순환사로 일해 온 30년을 부정당하는 기분”
간호법을 기다렸던 체외순환사들이 오히려 직업을 잃을 위기에 몰렸다. 이들의 위기는 심장 수술 중단 우려로 이어지고 있다. 대한간호협회의 ‘전담간호사 제도화 방안’이 촉발한 현장의 혼란을 들여다봤다.
30년간 수술실과 중환자실에서 근무해 왔다. 심장혈관흉부외과 의사와 손발을 맞춰 소아 심장 수술을 하고 중환자실에서 환자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병원 인근에 살면서 연락이 오면 언제든 달려갔다. 어린 자녀를 데리고 가야 했던 적도 있다. 힘들었지만 심장 수술을 받고 깨어난 아이가 우유를 먹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면서 “살렸다”는 보람을 느꼈다. 한국 심장 수술 발전에 기여했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그래서 버틸 수 있었다. 서울대병원 조재희 체외순환사의 삶이다. 다른 체외순환사들의 삶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조 체외순환사는 최근 들어 지난 30년이 한순간에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낀다고 했다. 제정되기를 바랐던 간호법 때문이다. 간호법 제정으로 법적 지위를 얻고 전문직으로서 당당하게 일할 수 있기를 기다렸지만, 대한간호협회가 제안한 전담간호사 제도화 방안은 기대와는 다른 방향이었다. 체외순환은 심장혈관흉부 전담간호사가 하는 진료지원 업무 중 하나로 분류됐다. 그 어디에도 체외순환사를 진료지원 인력(PA)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은 없었다. 간협 제안대로 전담간호사 제도화가 이뤄지면 임상병리사 출신인 조 체외순환사는 직업을 잃게 된다. 전국 체외순환사 총 264명 중 임상병리사 등 의료기사 출신은 59명으로, 이들 모두 경력이 오래된 베테랑이다. 오는 6월 21일 간호법 시행 후 이들이 더 이상 체외순환사로 일할 수 없게 되면 상당수 지방 대학병원은 심장 수술을 멈춰야 한다. 대한심장혈관흉부외과학회는 의료기사 출신 체외순환사가 빠지면 심장 수술의 40~50%는 중단된다고 했다.
간호법 기대했던 체외순환사들, 사라질 위기…“심장 수술 멈춘다” 간호법 이대로 시행되면 간호사 출신 체외순환사도 불법 위기 "전담간호사 업무 분야 18개로 분류"…'간협 중심' 교육·관리 체계 제안
조 체외순환사는 청년의사와 인터뷰에서 “무사히 심장 수술을 받고 성장하는 아이들을 보며 내 직업에 자부심을 가졌다”고 했다. 하지만 간호법 시행을 한 달여 앞둔 지금, 체외순환사로 일해 온 지난 30년을 “부정당하는 기분”이라고 했다. 해법은 간단하다고 했다. 대한체외순환사협회와 흉부외과학회가 체외순환사를 간호사로 일원화하기로 한만큼 간호법 하위법령에 기존 의료기사 출신에 대한 경과조치를 두면 된다고 했다. 또 체외순환을 ‘특수 진료지원 행위’로 명시하고 법적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고 했다.
- 임상병리사가 아닌 체외순환사로 일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우연이었다. 임상병리사 자격을 취득한 후 지인을 통해 체외순환사를 알게 됐고 흥미를 느꼈다. 심장 수술을 많이 하는 부천 세종병원이 첫 직장이었다. 그때가 1995년이었고, 그 후로 줄곧 이 일을 해왔다. 수술 현장에서 하나씩 배워 나갔다. 특히 소아 심장 수술을 먼저 접했다(그는 지금도 서울대병원 어린이병원에서 소아 심장 수술을 지원하고 있다. 서울대병원 소속 체외순환사는 총 9명이며, 조 체외순환사는 그중에서도 베테랑이다). 심장 수술을 받은 아이들이 무사히 회복해서 성장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보람을 느꼈다. 운도 좋았다. 그맘때쯤 흉부외과학회에서 체외순환사 교육을 시작해서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 흉부외과학회가 체외순환사 자격인증제를 운영하는 등 교육과 질 관리를 하고 있지만, 법적 지위가 확보된 직업은 아니다.
맞다. 병원 현장에서 수십 년 동안 체외순환 업무를 맡아왔다. 체외순환사협회와 흉부외과학회가 자격시험과 보수교육까지 체계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아직 ‘직군’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내부적으로는 다 준비돼 있었고 간호법에 기대를 걸기도 했다. 하지만 마지막 제도화 단계에서 방향이 갑자기 바뀌어 당황스럽다.
- 간협이 제안한 전담간호사 제도화 방안을 두고 한 말인가(간협은 전담간호사의 진료지원 업무를 18개 분야로 분류하는 방안을 지난달 10일 공개했다).
그렇다. 현실적으로 병원 내 가장 많은 직군은 간호사이고, 법적 보호도 받는다. 그래서 초반엔 간호사 직군 중심으로 체외순환사를 법제화하자는 데에 동의했다. 대신 기존 의료기사 출신 체외순환사들도 특수성을 인정받고 제도 안에 흡수될 수 있게 하자고 했다. 간호법이 우리 같은 특수직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되길 바랐다.
- 간협이 제안한 전담간호사 제도화 방안을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큰 문제는 체외순환 업무를 단순히 '전담간호사 역할 중 하나'로 분류했다는 점이다. 그러면 수년간 현장에서 일해 온 체외순환사들이 제도권 밖으로 밀려나고 새롭게 교육받은 간호사들만 체외순환 업무를 맡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업무는 단순 교육만으로 대체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숙련이 필요한 분야다. 인력이 갑자기 빠지면 심장 수술 자체가 중단될 수밖에 없다.
- 이번 논란이 개인적으로도 큰 충격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 30년을 체외순환사로 살아왔다. 최근 벌어진 일을 딸에게 얘기하며 “이제는 이 일을 못 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더니, 딸이 “그게 말이 돼?”라며 깜짝 놀라더라. 나도 감정이 북받쳐서 울컥했다. 평생을 바쳐서 해온 일이 하루아침에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참담했다. 그만큼 이 일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크다.
-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가장 중요한 건 체외순환사의 전문성과 특수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간호사든 임상병리사든 직군을 나누지 말고, '체외순환사'라는 울타리 안에서 기준을 마련하면 된다. 흉부외과학회와 체외순환사협회가 자체적으로 질 관리를 하고 교육체계를 유지해 온 만큼, 보건복지부가 이 체계를 법적으로 인정해 주는 방향으로 가야 혼란 없이 현장이 유지될 수 있다.
- 현재 전국에 체외순환사는 총 264명뿐이다. 체외순환사가 법적 지위를 획득하면 향후 인력 양성에도 도움이 된다고 보는가.
지금은 일이 너무 힘들고 제도화도 안 되어 있어서 지원자도 거의 없다. 하지만 법적 지위가 생기고 전문직으로 인정받게 되면 이 일을 하겠다는 사람이 더 생길 수 있다. 그게 없으면 아무리 TO를 열어도 들어오는 사람이 없다. 결국 이 일은 ‘살릴 수 있는 사람’을 키워야 하는데, 그 기반이 제도화로 만들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