췌장 외분비 기능 장애로 평생 소화제 복용해야 하는 환자들
소화제 일괄 비급여 조치로 약값 부담 커져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는 73세 김철수(가명)씨는 지난 2007년 췌장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췌장암은 암 중에서도 생존율이 낮다고 알고 있던 터라 죽음의 문턱에 가 있는 느낌이었다. 그해 3월 수술을 받은 김씨는 췌장을 다 들어내야 했다.

김씨의 예후는 좋았고 얼마 후 퇴원했다. 하지만 그에게 또 다른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췌장을 모두 제거한 김씨가 복용해야 하는 ‘소화제’였다. 김씨는 인슐린 주사 외에 소화제인 ‘췌장 효소제(Pancreatic enzyme)’를 평생 복용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소화제가 인슐린 주사보다 비싸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췌장이 없는 그는 췌장효소 농도가 높은 ‘노자임캡슐4000’과 같은 소화제를 복용해야 한다. 하지만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한 달 약값만 7만~8만원 정도 든다. 인슐린 주사는 건강보험이 적용돼 90일 평균 2만원 정도만 부담하고 있다.

김씨는 “소화제가 이렇게 비쌀 줄 몰랐다. 오히려 인슐린 주사가 더 싸다. 평생 소화제를 먹어야 하는데 부담이 크다”며 “나처럼 소화제를 평생 먹어야 하는 환자들이 많을 것이다. 인슐린처럼 정부가 나 같은 환자가 복용하는 소화제도 지원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췌장암으로 췌장을 모두 절제한 김철수(가명)씨는 청년의사와 만난 자리에서 평생 복용해야 하는 소화제가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비싸다고 하소연했다.

싼 약으로 바꾸거나 약 먹길 포기하는 췌장질환자들

김씨처럼 췌장을 다 잘라 내거나 만성췌장염 등으로 췌장이 소화 효소를 생성하는 외분비 기능을 하지 못하는 환자는 평생 소화제를 복용해야 한다. 소화제를 복용하지 않으면 지방과 영양 흡수가 되지 않아 체중 감소, 대사성 골질환, 비타민 결핍, 영양실조 등 여러 증상이 발생할 수 있다. 영양 흡수가 제대로 되지 않아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까지 초래할 수도 있다.

치료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췌장 효소 농도가 높은 소화제를 매일 복용하면 된다. 문제는 약값이다. 지난 2002년 소화제가 모두 건강보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약값을 전액 환자가 부담하게 됐다. 일반의약품인 소화제가 모두 비급여가 되기 전에는 의사의 처방전이 있으면 약값의 30%만 환자가 부담하면 됐다.

전문가들은 질환에 따라 구분하지 않고 소화제를 일괄적으로 비급여로 전환해 췌장질환자의 부담이 커졌다고 지적했다. 소화제를 필수적으로 복용해야 하는 췌장질환자 중에는 약값 부담 때문에 췌장 효소 농도가 낮은 ‘싼 약’으로 대체하는 경우도 많다. 일부는 소화제 먹기를 포기하기도 한다.

대한췌담도학회는 2016년 기준 만성췌장염, 췌장암 환자는 총 2만1,615명이며 이 중 췌장 외분비 기능 부전으로 소화제를 복용해야 하는 환자는 50%인 1만명 정도로 추정했다.

대한소화기내시경학회 보험이사를 맡고 있는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 소화기내과 박병규 교수는 “지방은 비타민을 흡수하는 등 몸속에서 여러 일을 하는데 이 지방이 흡수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며 “췌장 외분비 기능 장애가 있는 사람은 지방 흡수를 위해 췌장효소제를 복용해야 한다. 외분비 기능 장애는 비가역적이기에 췌장효소제를 평생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농도가 높은 췌장효소제는 한 달 약값이 7만~8만원 정도 한다. 이 약을 평생 먹어야 한다고 하면 부담스러워 하는 환자들이 많다”며 “소화제를 먹지 않는다고 통증이 심해지는 것도 아니니 먹지 않고 버티는 환자도 있다”고 했다.

박 교수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위해 비급여의 전면 급여화를 추진하고 있는데, 췌장 외분비 기능 장애가 있는 환자에게는 소화제가 필수 치료제”라며 “만성췌장염, 췌장암 환자 등 췌장 외분비 가능 장애에 대해서만 이라도 소화제를 급여로 먹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성췌장염·췌장암 등으로 제한해 소화제 급여화해야”

전문 학회들도 췌장질환자에 대한 소화제 급여화를 꾸준히 요구하고 있다. 췌담도학회와 소화기내시경학회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등에 공문을 보내 만성췌장염, 췌장암, 췌장수술 등으로 췌장 외분비 기능 장애가 있는 환자에 대한 소화제 급여화를 요청했다.

췌담도학회는 “만성췌장염, 췌장암, 췌장절제술 등으로 인해 생긴 췌장 외분비 기능 장애를 개선하는 유일한 방법은 췌장 효소제를 지속적으로 투여하는 것 외에는 없다”며 “현재 췌장효소제는 일반의약품으로 급여 혜택이 없다. 환자에 따라서는 최근 나온 장제피형 마이크로스피어(enteric coated microsphere)제제를 투여할 수밖에 없는데 이 경우 한 달 약값이 7만2,000원 정도”라고 말했다.

학회는 “질환의 특성상 평생 지속적으로 투여해야 하므로 환자의 약제비 부담이 적다고 할 수 없다. 췌장 외분비 기능 장애의 경우 췌장 효소제 투여 시 급여 확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한내과학회도 지난 2016년 10월 국정감사를 앞두고 당시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박인숙 의원실에 제출한 의견서를 통해 만성췌장염, 췌장암, 췌장수술 등으로 췌장 외분비 기능 장애가 있는 환자에 대해서는 췌장효소제를 급여로 복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지난 10여년간 모든 소화제는 비급여로 유지되고 있다. 이는 의약품의 경우 급여 등재 신청을 제약사에서 해야 하는데 제약사가 급여보다는 비급여를 선호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심평원 관계자는 “의약픔 급여의 경우 제약사가 급여 등재 신청을 해야 한다. 급여를 확대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도 제도상 제약사가 등재 신청을 하지 않으면 급여 여부 자체를 결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 대학병원 교수는 “급여로 등재되면 약은 더 많이 나가겠지만 가격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췌장효소제의 경우 필수 의약품이기 때문에 필요한 환자들은 비급여여도 사서 복용할 수밖에 없다”며 “제약사 입장에서는 굳이 급여 등재 신청을 할 필요가 없는 셈이다. 때문에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했다.

저작권자 © 청년의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