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섭의 헬스케어 이노베이션

[청년의사 신문 최윤섭] “당신은 신의 존재를 믿습니까?”

필자는 1997년 개봉한 SF영화 ‘컨택트’를 아주 좋아한다. 인류가 외계 문명을 최초로 접할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에 대해서 현실적이고도 진지한 시각으로 다룬 수작이다. 영화에서는 인류가 외계에서 온 메시지를 최초로 접한 후, 인류를 대표할만한 사람 한 명을 선발하려 한다.


평생 외계 문명을 탐색해왔던 과학자 애로웨이 박사(조디 포스터 분)는 선발 과정의 마지막에 이 철학적 질문을 받는다.

“나는 과학자로서 근거에 의존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판단을 내릴만한 데이터가 없다고 생각한다.”

신에 대한 철학적인 논쟁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녀의 말은 과학의 근본적인 원칙을 보여준다. 바로 과학적인 주장에 대해서는 근거가 있어야만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논문에서 표와 그림을 통해서 데이터를 보여주는 것도, 통계 분석을 하는 것도, 일일이 참고 문헌을 표기하는 것도 이를 위해서이다.

테라노스 사태를 보면서 필자가 떠올렸던 것도 애로웨이 박사의 그 한마디였다. 실리콘밸리에 혜성처럼 등장한 진단기업 테라노스는 그야말로 완벽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피 한 방울로 수많은 질병을 진단하는 기술을 보유했다고 주장하는 이 기업은 스탠퍼드 대학을 자퇴한 젊은 여성 CEO가 비밀리에 기술을 개발해왔다는 것이 알려지며 더욱 주목받았다.하지만 문제는 이 기업이 주장하는 혁신적인 기술에 비해 그동안 보여준 ‘근거’는 너무도 빈약했다는 것이었다. 기업 비밀을 주장하며 분석 방법과 원리 등은 모두 베일에 쌓여 있었다.

최근 월스트리트 저널은 익명의 내부자 제보를 통해 테라노스의 기술이 실체가 없거나 크게 과장되었으며, 일부는 위법의 여지도 있다는 폭로 기사를 내보냈다. 이후 테라노스에 대한 여론은 급격히 악화되는 양상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아주 간단한 문제였다. 근거와 데이터가 없는 과학이란 있을 수 없다. 혁신적인 기술이 있다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근거와 데이터 없이 그 주장을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테라노스에 투자하거나 서비스를 제공한 기업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러한 원칙을 지키지 못했다.

테라노스의 기술이 정말 존재하는 것인지, 혹은 희대의 사기극으로 끝날지는 데이터가 나올 때까지 지켜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논란은 우리에게 과학에 대한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원칙을 다시금 상기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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