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영의 모노태스킹

[청년의사 신문 박재영] “병원 혁신을 가로막는 걸림돌을 4가지로 정리해 본다면?”

지난 9월에 열린 HiPex(Hospital Innovation and Patient Experience Conference, 이하 하이펙스) 2015 셋째 날, 300명의 참가자들에게 이런 질문이 던져졌다. 청중들은 무대 위에 있는 사람들이 4가지 걸림돌을 발표하거나 그 걸림돌을 극복하는 방법을 알려줄 것이라 예상했지만, 100분이 할애된 그 시간은 모든 참가자들이 ‘토론’을 통해 병원 혁신을 가로막는 가장 중요한 걸림돌들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문제를 명확히 하는 것이 해답을 찾는 첫 단계이니 말이다.


처음엔 어색해 하던 청중들은 실시간 문자메시지를 통해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했고, 4명의 패널들도 각자의 생각과 경험을 공유했다. 활발한 토론과 여러 차례의 거수, 그리고 꼼꼼한 자구 수정의 절차를 거친 후 마침내 정리된 ‘병원 혁신의 4가지 걸림돌’은 다음과 같다.

▲안전과 전문성이 중시되는 병원 특유의 보수적이고 경직된 조직문화 ▲최고경영진의 리더십 부족과 혁신의 방향성 모호 ▲직원들의 동기 부족과 특히 의사들의 참여 부족 ▲규제 중심의 의료정책과 저수가 기반의 의료 환경.

결과물만 얼핏 보면 평범해 보이지만, 사실 논의의 과정은 꽤 뜨거웠고 상당히 재미있었다. 참가자의 사후 설문조사에서 이 시간이 ‘하이펙스 2015’의 모든 세션 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프로그램’으로 선정되기도 했으니까.

논란과 재미의 핵심은 그 많은 걸림돌들을 단 4가지로 정리해야 하는 데서 비롯됐다. 최고경영진의 리더십 부족과 의사들의 참여 부족을 한 가지 항목으로 합칠 것인지 나눌 것인지, 직원들의 동기 부족과 의사들의 참여 부족은 합쳐야 할지 나눠야 할지가 쟁점이었다. 개별 병원들이 어쩔 수 없는 외부 환경의 제약이나 의료산업의 본질적 특징들은 또 어떤 비중과 단어로 표현할 것인지도 고민이었다. ‘부족’과 ‘부재’, ‘동기’와 ‘참여’ 등의 어감 차이도 고려했다. 맨 마지막에 ‘특히’라는 단어를 추가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청중들이 격하게 공감했다(의사든 아니든 공히).

진행자로서 가장 재미있게 느꼈던 부분은, 대부분의 청중들이 의사와 의사 아닌 직원들을 꼭 분리해서 명기하려 했다는 점과 최고경영진과 나머지 의사들은 더욱 분리해서 생각하려 했다는 점이었다. 그 결과가 위와 같이 개별 병원 차원에서 노력해 볼 수 있는 항목과 그럴 수 없는 항목을 각각 두 가지씩 꼽았다는 점도 눈에 띄었다.

사실 혁신의 걸림돌은 매우 많다. 검색 엔진에 ‘혁신의 걸림돌(혹은 obstacles to innovation)’이라는 말을 넣으면 수없이 많은 문서들이 나온다. 3가지로 정리한 사람도 있고 7가지로 정리한 사람도 있고 20가지로 정리한 사람도 있다. 그 중에는 딱 한 단어로 요약한 사람도 있다(그 한 단어는 ‘YOU’다).

혁신은 원래 어렵다. 오죽하면 혁신이 혁명보다 어렵다는 말도 있겠는가. 혁신을 위한 노력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는 것도 아니다. 사실 위에서 정리한 네 가지 중에서 두 가지는 우리가 쉽사리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가장 쉬운 것부터, 가장 필요한 것부터 시작해 보는 것이 혁신의 첫걸음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불가능한 일을 억지로 시도하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고, 가능한 일인데 시도하지 않는 것은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 면에서 다음 기도문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제가 어쩔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시고, 어쩔 수 있는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그리고 이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소서.”

우리 의료계의 많은 ‘혁신쟁이’들이 이런 평온함과 용기와 지혜를 가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평범한 우리들이 어쩔 수 없는 것까지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권력자/리더들이 제발 좀 더 똑똑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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