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중의 감별진단

[청년의사 신문 김철중] 최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가졌다. 자신의 암인 흑색종이 간과 뇌로 전이됐음을 알리는 자리였다. 의료진은 현 단계에서 암을 완치할 치료법은 없다고 했다. 그는 말기 암 상태로 앞날이 불투명한 환자였지만 “나름 멋진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마음이 편하다”며 시종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런 카터에 어떤 이는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떠올리고, 어떤 이는 퇴임 대통령의 모델이라고 칭송한다.


미국에서는 이처럼 유명인들이 투병 사실을 공개하는 일이 잦다. 영화 자이언트의 주인공으로 핸섬한 얼굴과 남자다운 매력으로 1950~1960년대 큰 인기를 누렸던 배우 록 허드슨. 그는 59세이던 1984년, 병색이 완연한 초췌한 모습으로 대중 앞에 등장했다. 피부에는 발진도 보였다. 자신이 에이즈(AIDS)에 걸린 사실을 공개했다. 당시만 해도 에이즈는 천형의 공포였다. 록 허드슨의 커밍아웃으로 에이즈 경각심이 커지고 퇴치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그는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미국의 유명 TV뉴스 여성 앵커 케이티 쿠릭(Kate Couric)은 2000년 방송에 나와 대장내시경 검진을 받으라고 호소했다. 두 해 전 그녀의 남편은 대장암으로 4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대장암 검진을 안 받아서 나처럼 사랑하는 가족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였다. 미국의사협회지에 실린 이 캠페인 효과 분석에 따르면, 대장내시경 검진 건수가 그 이전 1000명당 1.3명에서 1.8명으로 늘었다. 이후 유명인의 질병 캠페인을 ‘쿠릭 효과’라고 부른다.

2002년 흑인 여성 최초로 오스카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미국의 영화배우 할리 베리. 중년의 나이에도 여전히 탄력 있는 몸매와 자태를 뽐내는 그녀는 당뇨병 환자다. 선천적으로 혈당을 조절하는 인슐린이 부족한 제1형 당뇨병을 앓고 있다. 그녀는 당뇨병 때문에 TV쇼 촬영 도중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다.

그녀가 당뇨병 판정을 받은 것은 20대 초반. 그 이후로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혈당을 체크하고 인슐린 주사를 맞는 것은 물론, 철저한 식이요법과 운동을 하고 있다. 그녀는 오스카상 시상식 때 “당뇨는 삶을 헤쳐나갈 힘과 의지력을 심어준 커다란 선물”이라고 말해 당뇨 환자들에게 희망을 심어줬다. 그녀는 2004년부터 제약회사 ‘노보노디스크’의 후원으로 이뤄지는 ‘당뇨 알기’ 캠페인의 모델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에서 유명인 환자가 자신의 질병 광고나 캠페인에 나서는 것은 흔한 일이다. 프로농구 선수였던 매직 존슨은 제약회사 GSK의 광고 모델로 등장, 자신이 감염자이기도 한 에이즈에 대한 홍보 활동을 했다. 전립선암 수술로 발기부전이 된 전(前) 상원의원 밥 돌은 화이자의 ‘비아그라’ TV광고 모델로 섰고, 뇌졸중으로 쓰러진 영화배우 커크 더글러스는 브리스톨-마이어스 사(社)의 심장병 캠페인 주연으로 나왔다.

로널드 레이건은 말년에 “저는 치매를 앓고 있습니다”라는 대국민 편지로 고령사회를 맞아 알츠하이머병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그의 부인 낸시 레이건 여사는 유방암으로 유방 전체를 잘라내는 절제술을 받았다고 언론에 공개했다. 그러자 유방암에 걸린 여성이 유방절제술을 선택하는 사례가 25% 늘었다. 그전에는 암 덩어리만 제거하고 유방을 살리는 유방보존술이 선호됐다. 낸시 유방암 공개 이후 여성들의 유방암 검진 건수도 부쩍 늘었다.

유명인이 질병을 공개하거나 관련 캠페인에 나서면, 질병 경각심이 높아지고 예방 효과가 크다. 그러니 유명인 환자들이 더 많이 나설 수밖에…. 그것도 ‘유명세(稅)’이다. 록 허드슨은 “나의 불행이라도 남들에게 기여하는 바가 있으면 한다”는 말을 남겼다. 결국 환자가 의학의 역사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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