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찬의 통(通)하는 의료

[청년의사 신문 김용찬] 80년대 이전 대한민국은 ‘좋은 말씀’의 나라였다. 거룩한 말씀을 담은 포스터와 표어, 구호가 넘쳐났다. 근면, 자조, 협동의 삼위일체가 대한민국의 수호 말씀처럼 전국에 퍼졌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애국조회와 명상의 시간을 통해 좋은 말씀과 거룩한 말씀의 세례를 주기적으로 받았다. “새벽종이 울렸”으니 “너도 나도 일어나” 새로운 마을을 “우리 힘으로 만들자”는 확성기의 거룩한 말씀이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을 깨웠다. TV나 라디오는 좋은 말씀을 실어나르는 중요한 매체였다. 대한민국은 전국이 산업기지이고, 병영이었다.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와 “초전박살”류의 비장한 말씀들이 낮에는 구름기둥이 되고, 밤에는 불기둥이 되어 어리석은 백성들을 인도했다.


세상이 바뀌어 옛 구호들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거룩한 은혜의 말씀들은 우리가 사는 도시에 넘쳐난다. 물론 80년대 이전보다는 훨씬 세련된 옷을 입고 있다. 거룩할 뿐 아니라 이제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광화문 네거리에 서보라. 교보 빌딩에 붙어 있는 예쁜 글귀를 피할 수 없다. 짧지만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감동적인 말씀, 그야말로 은혜의 말씀이다. 시청과 구청 건물에서도, 교차로에서도, 역전 광장에서도, 뒷산 산책길에서도 우리는 늘 어떤 글귀들을 만난다. 모두 선의로 쓰여진 좋은 말씀들이다. 서울 지하철 역 보호 유리막에는 싯귀들이 늘 붙어있다. 누군가 착한 마음으로 붙여놓은 감동적인 말씀들이다. 80년대 이전처럼 2015년에도 TV와 라디오는 여전히 좋은 말씀들을 전하는 역할을 한다. 사랑을 나누자, 우리 함께 해보자는 말씀을 여전히 찬송가처럼 읊조린다.

착하고, 거룩하고 감동적이기까지 한 글과 말들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일방적이라는 것이다. 보는 사람들은 기대도, 예상도 하지 않은 공공의 시간과 장소에서 이 글귀들이 일방적으로 출몰한다. 그리고 제멋대로 사람들의 사적인 삶의 맥락 안에 비집고 들어오려 한다. 종종 저항할 틈도 주지 않는다. 선의로 쓰여진 글이고, 착한 마음으로 전달된 것이니 백성들은 그저 수용하고 음미하고 마음에 새기면 될 뿐이다. 그래서 광화문 네거리 횡단보도 앞에서 사람들은 애국조회 훈시 듣는 까까머리 중학생들처럼 서서, 자신에게 주어진 문구들을 경건한 마음으로 묵상한다.

흔히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일방적 소통의 가장 대표적 매체는 현수막이다. 누군가 우리 사회를 현수막 공화국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현수막은 우리 사회를 ‘좋은 말씀의 나라’로 만드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매체이다. 몇 해 전 어느 대학에서 현수막 문제를 비판하는 세미나가 열렸다. 그런데 세미나 장소를 향해 가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세미나 개최를 알리는 현수막들이 눈에 들어왔다. 현수막 문제를 지적하는 모임을 알리는 현수막! 기가 막혔다. 한국사회가 어느 정도로 현수막 중독에 빠져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였다. 한국 사회는 거룩한 말씀들을 위한 최적의 서식지이다.

80년대 이전과 비교하면 세상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국 사회의 주된 소통 방식은 좋은 말씀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토론 프로그램에서도 참여자들은 여전히 각자의 좋은 말씀을 일방적으로 전달할 뿐이다. 소셜미디어가 쌍방 소통을 촉진한다지만, 우리는 이것을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거룩한 말씀을 전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페이스북과 카카오톡 그룹창에서 사람들은 모두가 모두를 상대로 애국조회 훈시를 하고,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명상의 글귀를 읊는다.

청와대에서부터 우리 집 뒷골목까지 좋고 거룩한 은혜의 말씀들이 이렇게도 넘쳐나는데 우리 사회의 소통 환경은 오히려 날로 피폐해져 간다. 정말 중요한 정보들은 곡해되고,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원하지 않는 결과만 만들뿐이다. 누구 책임일까? 나는 우리 사회 공공장소에 붙어있는 거룩한, 하지만 일방적인 은혜의 말씀들을 고발하고 싶다. 우리가 생활하고 활동하는 장소에 널려있는 이 좋은 말씀들이 우리사회를 오염시킨다.

이런 환경에서는 국민 목숨이 달린 중요한 보건의료 정보들마저도 또 하나의 “꼰대” 말씀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그래서 다양한 위기, 위험 정보를 제대로 전하려면 필요이상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우리 시선을 사로잡고 우리를 감동시키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 거룩한 은혜의 말씀들, 그것들을 전달하는 간판과 현수막과 포스터를 내릴 때 우리가 사는 도시의 소통 환경은 조금 숨 쉴 여유를 갖게 될 것이다. 그래서 묻고 싶다. 우리 도시를 장악하고 있는 거룩한 말씀들, 오늘 당장 내릴 수 없을까?

저작권자 © 청년의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