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lection after the World Innovation Summit for Health 2015전규찬(Thomas Jun) 영국 러프버러대 디자인스쿨 교수

메르스 사태 이후 ‘시스템 부재가 문제’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시스템’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시스템적 접근법’이란 또 무엇인가? 영국 러프러버대학교 디자인스쿨의 전규찬 교수가 시스템적 접근법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것이 환자 안전 향상이나 의료서비스의 질 개선에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소개하는 글을 보내왔다. 전규찬 교수는 지난 12년간 인간/시스템공학적 접근법을 의료시스템/서비스 디자인과 환자 안전 개선에 적용하는 문제와 관해 연구해 온 전문가다. “BMC Health Service Research” 저널의 Associate Editor이며, World Innovation Summit for Health 2015의 환자안전포럼의 자문위원이기도 하다.

[청년의사 신문 청년의사] 저는 2015년 2월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World Innovation Summit for Health 2015 (WISH2015)의 Patient Safety 포럼에 자문위원으로 참석하였습니다. WISH는 보건, 의료 관련 정책가, 경영자, 연구자들 간의 국제 협력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당면한 의료 관련 문제를 같이 풀어 나가자는 비전을 가진 국제회의입니다. 이 행사는 카타르 재단의 후원으로, 영국의 임페리얼 컬리지 의료정책 혁신연구소장으로 있는 Lord Darzi 교수가 의장을 맡았으며, 전 세계 80개국에서 1,000여 명의 정책 결정자들과 의료계 리더들과 석학들이 모인 자리였습니다. 참석자 중 각국의 보건의료 관련 장관급 인사들만 30명이 넘었습니다.


총 9개의 포럼 주제 중 제가 자문위원으로 기여한 포럼은 환자 안전 문제를 시스템 방법론으로 어떻게 풀어 나갈 것인지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 포럼의 리더는 존스홉킨스 대학 Armstrong Institute of Patient Safety and Quality의 director인 Peter J Pronovost교수가 맡았고, 자문위원들로는 현재 WHO의 Patient Safety Ambassador를 맡고 있는 Sir Liam Donaldson, 영국 NHS의 Director of Patient Safety인 Mike Durkin, 인도 아폴로 병원 Managing Director인 Preetha Reddy, 영국 레스터대학의 의료사회학자인 Mary Dixon Woods 교수와 존스홉킨스 대학 비즈니스 스쿨의 Kathleen Sutcliffe 교수 등 12명의 정책, 실무 및 학계의 전문가들로 구성되었습니다. 4개월간 인터뷰와 수차례 원격 회의를 통해 작성된 리포트(Pronovost, J.P., Ravitz, D.A., Stroll, A.R. and Kennedy, B.S., Transforming Patient Safety: A Sector-Wide Systems Approach, Report of the WISH Patient Safety Forum 2015)의 내용을 제 연구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의 문답식으로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 환자 안전, 심각한 문제인가요?

점보 여객기가 추락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이틀에 한 번씩 발생한다면 항공업계, 승객, 가족, 정부가 어떻게 반응할까요? 의료 기술이 가장 발달한 미국에서 의료 과실로 사망하는 수가 이 정도라는 연구 결과가 2000년 초반 이후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다른 선진국들에서도 열 명 중 한 명의 입원 환자가 의료 과실로 인한 상해를 겪는 등 미국과 비슷한 상황이라는 연구 결과가 보고되어 왔습니다. 지난 15년 동안 여러 가지 서비스 질 향상 방법론(lean, six sigma 등)을 이용하여 의료의 질과 안전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해 왔지만, 전체 시스템 차원에서 의미 있는 개선이 되었다는 연구 결과를 찾기는 어렵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 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어려울까요?

어쩌면 우리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전제 하에 의료 시스템을 보고 있는 것이 개선을 어렵게 하는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첫째, 의료진의 과실로 환자가 의료 서비스를 받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상해를 입는 것은 항상 있어 왔고, 이것은 그냥 당연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 서로 다른 의료기관들은 제각각 역할과 목표가 있고, 그리고 거기에 따른 데이터와 시스템이 있고, 나름대로 의료의 질과 안전을 개선하려고 하고 있다. 여러 기관들이 포함된 전체 의료 시스템을 조율하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셋째, 어떠한 불리한 환경과 시스템이 있더라도 의료진이 정신 차리고 열심히 한다면 된다. 의료 시스템은 초인적인 영웅의 역할을 의료진들로부터 기대하고 거기에 의존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 시스템은 무엇이고, 시스템 방법론은 무엇인가요?

일반적으로 시스템이라 하면 어떠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같이 협력하는 조직이고, 그 내부는 인간과 테크놀로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흔히 테크놀로지만을 시스템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시스템은 인간, 테크놀로지, 조직이 다 포함된 개념입니다. 의료 시스템의 경우 목표는 환자에게 상해를 입히지 않고 건강을 증진시키는 것이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많은 시스템들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넓게 볼 때 의료 시스템은 단순히 병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건기관, 1차 의료기관, 2차 의료기관, 약국, 제약회사, 자원봉사 기관 등 모든 국민의 건강과 관련된 기관들을 다 포함합니다. 이 개별 기관이 다른 기관이나 전체 시스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 운영될 때, 종종 전체 시스템의 브레이크 다운으로 이어집니다.

의료 시스템에서 시스템 방법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는 이 모든 기관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보건, 의료, 복지의 질과 안전을 지속적으로 개선하여, 낭비 요소와 비용을 줄이면서 국민들의 건강 상태를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미국 Institute for Healthcare Improvement의 전 회장인 Donald Berwick이 말한 triple aim, 즉 ‘better health and better care at lower cost’를 달성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목표를 정책가, 의료진들뿐만 아니라 환자 및 그 가족들과 함께 달성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시스템적인 접근법은 여러 관련자들과 같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를 명확히 정의/동의하고, 많은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 의료계는 다른 업계로부터 무엇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요?

의료 시스템 외에 ‘안전’이 필수로 요구되는 다른 산업들, 즉 항공, 도로교통, 핵발전, 방위산업 등은 전체 시스템의 통합을 통해서 안전과 생산성을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향상시켜 왔습니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서 중요했던 것은 시스템간의 접점(interface)에서 두 시스템이 서로 상충하는 이해관계나 기능을 조율하는 시스템 통합자의 역할이었습니다. 시스템 통합자는 미국 교통안전 개선을 위한 National Highway Traffic Safety Administration(NHTSA)이나 영국 환자안전 개선을 위한 National Patient Safety Agency(NPSA)와 같은 조직일 수도 있고 개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개인이 시스템통합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제가 런던 이슬링톤구의 지역 의료를 담당하고 있는 Islington Clinical Commissioning Group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진행한 시스템 안전 개선 과제에서 시스템 통합자의 역할을 예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지역에는 저소득층의 이민자들이 살고 있는 비율이 높은데, 그 중에는 75세 이상의 고령이면서 혼자 살고 있으며 여러 합병증으로 10개 이상의 약을 드셔야 하는 경우들도 많습니다. 이런 환자들이 처방된 약을 제대로 복용하지 않거나 잘못 복용해서 2차 의료기관에 입원하는 경우가 증가하여 병원 시스템에 부담을 주는 상황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사용하지 않고 버리는 약으로 인한 낭비가 영국에서만 연간 6천억원에 이른다는 최근 연구 결과에 비추어, 약의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는 것도 이 과제의 2차적 목표였습니다. 결국 이 과제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와 같은 환자들을 지원할 수 있는 통합 프로세스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 과제에서 시스템 통합자의 역할은 여러 관련자들이 운영하는 작은 시스템의 프로세스들을 이해하고 다른 작은 시스템간의 접점을 조율하면서 여러 관련자들과 함께 통합 프로세스를 만들어 가는 일이었습니다.

관련자들은 1차 진료와 약 처방을 담당하고 있는 general practitioner, 환자가 약을 다 복용할 시점에 환자 대신 약을 신청하고, 조제하고 심지어는 배달까지 해주는 community pharmacist, 환자의 집을 정기적으로 방문해서 복지 관련 일을 하는 social care worker, 환자의 거동이 불편할 경우 환자의 집을 방문해서 건강과 관련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community nurse, 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처방도 하는 hospital doctor, 이 지역 의료의 예산을 담당하고 있는 clinical commissioner,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환자와 환자 보호자들을 포함합니다.

결국 이 과제는 전체 시스템의 관점에서 다양한 관련자들과 함께 여러 작은 시스템과 프로세스를 고려한 통합 프로세스를 만들어 냈습니다. 예를 들어 각 접점에 있는 관련자들이 환자들과 대화하는 방식을 바꾸어 환자가 처방내용을 더 잘 숙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있습니다. 처방시, 조제시, 배달시에 환자에게 처방 내용을 되물어(teach back), 환자가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필요하면 정정을 해주는 절차입니다. 또 다른 예는 새로운 접점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습니다. GP-based specialist pharmacist라는 접점을 새로 만들어 지역 내에 많은 종류의 약을 처방 받은 독거노인들, 즉 위험성이 높은 환자들을 데이터베이스 검색을 통해 사전에 선별하여 미리 연락하여 적절한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또한 general practitioner가 위험성 높은 환자들을 진찰할 시에, 이 접점으로 환자들을 보내 추가적인 도움을 받게 하는 프로세스입니다.

- 의료계가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특별히 의료 시스템과 같이 수많은 작은 시스템들이 모여 큰 시스템을 이루고 있고 복잡한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는 경우에는 시스템적인 접근법이 더욱 중요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적용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앞서 제시한 우리가 전제하고 있는 세 가지 생각들을 재고하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첫째, 의료진의 과실로 환자가 의료 서비스를 받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상해를 입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심각하게 잘못된 것이고 개선해야 한다.

둘째, 여러 기관들의 목표와 기능을 조율하여 공동의 목표를 위해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하지 않고, 오로지 이렇게 할 때만 최소한의 낭비로 안전하고 양질의 의료서비스가 가능하다.

셋째, 초인적인 영웅의 역할을 하는 의료진들에게 기대하고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시스템은 잘못되었고 매우 취약할 수 있다. 시스템이 의료진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 져야 한다.

특히 경쟁과 생존이 우선시되는 환경에서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협력을 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시스템이 변화한다는 것은 개인이나 조직의 측면에서 생존을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일이 될 수도 있기에 변화가 더욱 어렵습니다. 또한 매일매일 업무로 바쁜 의료인들이 시간을 내어 통합 프로세스에 대해 다른 관련자들과 같이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한다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복잡한 시스템의 문제를 같이 해결해 가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고 소규모라도 장기적인 비전이 있는 분들이 모여 새로운 모델을 연구하고, 제시하고, 공감대를 확대해 갈 때 변화의 씨앗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시스템 통합자는 정책, 법률, 평가, 교육, 리더십, 참여, 테크놀로지 등 다양한 측면을 고려하여 통합해 가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어쩌면 최근의 메르스 사태는 우리 사회의 시스템 부재의 문제점을 알려준 계기였던 것 같습니다.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동시에 서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의료시스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스템적인 방법과 준비가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어떻게 의료시스템을 개선할 수 있는지 이해하는 데 이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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