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두 교수의 Palliative Care

[청년의사 신문 장영두] 어느 누구에게나 불안감이나 두려움이 다가오는 시기가 있을 것이다. 그런 감정의 변화가 나타나는 시기의 공통점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항상 전제가 된다. 공중 방역을 이야기하면서 일반 대중에게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 비밀주의는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막연한 불안감을 더욱 가중시키는지 다시금 최근의 메르스 방역대책에서 배웠다. 이렇듯 사람들은 정확한 정보와 예측 속에서 현명하고 합리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이성적인 존재임에 틀림없다.


우리와 미국의 의료 문화에서 큰 차이 중 하나를 꼽으라면 환자 본인에 대한 정보공개와 자기결정권에 대한 태도일 것이다. 우리의 문화에서 적어도 암과 관련된 진단과 치료에 관해서는 아직도 환자의 자기 결정권에 대한 모호한 법체계와 일관성의 부재가 존재한다. 우리는 부모님이 불행하게 암에 걸리시면 일단 환자본인에게 함구하고 자녀들이나 배우자와 상의를 한다. 최근에는 많이 변화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두 개 연구조사를 보면 약 68~78% 환자가 자신의 치료 불가능한 암 진단을 알고 있고, 이는 곧 더 나은 인간다운 죽음을 대비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보고하고 있다.

또한 본인의 질병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약 1/3은 본인의 직접적인 의사결정을 회피하는 경우였다. 그러나 본인이 질병의 진행과정을 인지하고 있는 경우엔 치료에 관한 의사결정의 관여 여부와 상관없이 삶의 질은 질병의 진행 정도를 모르고 있는 경우보다 높게 나타났다고 한다.

미국적인 의료문화에서 본다면, 환자에 대한 질병정보를 본인의 동의도 없이 배우자나 자녀에게 공유하는 것부터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본인의 인지상태와 무관하게 다른 사람의 판단에 의해 자기 삶의 중요한 선택을 강요 받는다는 것은 받아들여지기 힘든 일이다. 물론 환자 자신의 정신적, 신체적 상태로 인해 정확한 의료진의 설명의무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판단이 어려운 경우엔 의사의 진단에 의해 미리 정해진 의사결정권자에게 판단을 위임하는 제도가 있다(Surrogate decision making).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환자의 최대한의 자기결정권을 보호하기 위한 존중에서 비롯된 제도이다. 다시 말해 의사대리 결정권자로 지목된 사람은 자신의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환자에 대한 삶에 대한 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의료에 대한 의사 결정권을 환자를 위해 대신 표현하는 역할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의사결정대리인의 판단에 대한 정확도는 60~70% 정도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다시 말해 1/3의 환자는 자신이 기대했던 의사결정에 반하는 치료나 판단에 고통 받다가 죽는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1998년과 2006년도 조사에서 유사한 추이를 보인다.

미래의 어느 날 내가 많이 아파서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여러 가지 검사를 하고 아내와 자녀들과 다시 같이 오기를 권한다. 무언가 이상하지만 그렇게 하기로 하고 집으로 향했다. 무언가 잘못된 거 같은 불안감이 밀려온다. 아내와 자녀들은 나에게 잘될 것이라고만 이야기하는데 나의 몸 상태는 더욱 안 좋아지는 느낌이다. 의사는 무언가 계속 검사를 해대고, 병원에서 무언가 주사를 맞고 오면 몹시 아프고 더욱 피곤해지며, 밥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토하거나 기력이 없어진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다. 20년 전 내가 꼭 만나고 싶었던 친구가 생각이 났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늦었다. 너무 기력이 없어서 엄두도 못 내고 말았다. 어젯밤 꿈에 어릴 적 초등학교 운동장이 생각났다. 가보고 싶었지만 갈 수 없다. 아내를 위해서 몰래 모아온 적금도 은행에 가서 처리해야 하는데 갈 수가 없다. 그러고 나는 그렇게 나날이 쇠약해져 눈을 감는다. 나는 적어도 내가 왜 몸이 아프고 약해져 가는지 알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지금 상태에서 무엇을 할 수 있고, 없는지 알아야 시간과 순서를 정해 차근차근 나의 삶을 정리해서 삶을 의미 있게 마감하고 싶다. 이건 나의 소망이지만 또한 누군가에도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는 건 병이 아니라 아는 것은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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