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사 신문 양영구] 어릴 적 할머니 댁에서 소에게 여물을 먹일 때, 소가 허겁지겁 먹다 말고 거품을 물며 헛입을 놀리는 모습을 보면서 ‘왜 저런 역한 행동을 할까’ 궁금해 했던 기억이 있다. 더 나이가 들어 그게 되새김질이었다는 것을, 처음 먹은 음식을 다시 잘게 부숴 몸에 흡수가 잘 되도록 하기 위한, 소에게 반드시 필요한 행위임을 알게 됐을 때 고개를 끄덕였었다.

주위를 돌아보면 ‘되새김질’이 비단 소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안전하고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만들어낸 법과 정책도 사회구성원에게 잘 흡수돼 작용하게끔 ‘되새김질’을 하고 있지 않나.

그런데 최근 국회에서 진행된 메르스 관련 법안 통과를 보면서 다시 한번 되새김질의 필요성을 공감하게 됐다. 최근 메르스 사태로 전문성을 갖춘 감염병 역학조사관의 필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감염병예방관리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이 법안은 현재 질병관리본부 소속으로 일하는 역학조사관의 90%는 공중보건의사로 구성돼 있어 전문성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에 조사관의 자격을 강화한 것이 골자다. 통과된 개정안은 ▲방역·역학조사 또는 예방접종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 ▲의료인 ▲약사, 수의사 등 감염병·역학 관련 분야 전문가 중 역학조사 교육·훈련 과정을 이수한 사람을 역학조사관에 임명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같은 법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대뜸 약사도 역학조사관으로 임명하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유를 들어보니 관련법 개정을 위한 논의에 앞서 대한약사회에서 약사도 역학조사관에 임명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의 의견서를 전달했다고 한다. 역학조사관의 자격기준이 의료인과 공무원으로 규정돼 있어 약사도 충분히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의견을 전달하기 위한 취지였단다. 하지만 그냥 이익집단의 숟가락 얹기이며, 전문성을 강화하려는 법안의 취지와 배치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다.

한 번 만들어 놓은 법을 고치기 위해 다시 꺼내는 것이 자신들의 결정을 번복하는 것 같아 역해 보이겠지만, 당초 목적인 감염병에 전문성을 갖춘 역학조사관 구성을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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