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찬의 통(通)하는 의료

[청년의사 신문 김용찬] 필자가 남들보다 운전이 서툴러서 그런지, 인격 수양이 덜 되어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아직도 운전을 할 때면 애매한 교통신호들 때문에 투덜거리곤 한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그 중 두 가지만 얘기해 보겠다. 첫째는 이것이다. 하나의 교통신호는 하나(그렇다, 반드시 단 하나)의 의미만 갖고 있어야 할 텐데, 종종 복수의 의미를 불규칙적으로 전달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다. 왼쪽으로 휘어진 화살표가 도로 바닥에 그려져 있으면 무엇을 의미할까?


그동안 겪은 경우들을 따져보면 적어도 다음 세 가지 중 하나다. (1) ‘이 차선에 계속 있으면 반드시 좌회전만 해야 하니 좌회전할 거면 여기 있고 직진할 거면 오른쪽 차선으로 옮겨라’. (2) ‘직진도 가능하지만 좌회전도 할 수 있는 차선이니까 알아서 해라’. (3) ‘여기는 직진만 가능한 차선이니까 좌회전 하려면 미리미리 왼쪽에 있는 좌회전 차선으로 옮겨라’. 이런 말들이다. 그러니까 똑같은 표시가 “좌회전만 가능”, “좌회전도 가능”, “좌회전이 불가능하므로 옆 차선으로 이동”의 의미를 다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낭패를 보지 않으려면 운전자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화살표가 이 중 무엇을 의미하는지 빨리 판단해야 한다.(아직도 불평하는 거 보니 내가 이게 잘 안 되는 모양이다.)

도로에서 투덜거리는 두 번째 이유는 너무 많은 메시지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경우 때문이다. 교통전문가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나라 교통 신호 체계는 꼭 하지 말아야 할 것만 써 놓는 방식의 ‘부정적 신호 체계’가 아니라, 해야 할 것들을 일일이 전달하는 ‘긍정적 신호 체계’를 따른다고 한다. 해야 할 것들을 다 말하려 하니 얼마나 말할 것이 많겠는가. 그래서 그런 건지 모르지만, 예를 들면 (역주행하지 않는 한) 어차피 앞으로만 갈 수밖에 없는 곳에도 직진 화살표가 바닥에 그러져 있다. 앞으로만 가라고 친절하게 말해주는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 도시에서는 이런 직진 화살표를 교차로 이외에서는 보지 못한 것 같다. 반면 북경이나 상해 같은 중국 도시에선 우리처럼 직진 화살표가 도로를 도배하고 있고, 가보진 않았지만 우연히 모스코바의 도로 사진을 보니 거기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중국이나 러시아와 같이 무수히 많은 신호들로 도로를 ‘시끄럽고’ 복잡하게 만들어놓은 경우에 속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문제들이 운전 미숙 때문에 나 혼자만 투덜거리는 것들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두 개의 불만사항을 묶어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도로에서처럼 안전이 중요한 곳에서는 꼭 필요한 정보를 ‘정확하게’, 그리고 ‘꼭 필요한 만큼만’ 전달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특히 병원과 같은 의료 환경에서 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환자가 담배를 끊어야 하는 게 맞는 것이라면 반드시 하나의 메시지 (금연!)를 정확하고 분명하게 말해주어야 한다. ‘담배, 끊을 수 있으면 끊는 게 좋아요’. 이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좌회전을 해도 좋다는 것인지, 좌회전만 해야 한다는 것인지 운전자가 헷갈리면 사고가 날 수 있는 것처럼, 대부분의 환자들에게는 정확한 지침이 필요하다.

환자 상태와 능력에 맞는 적정량의 정보를 전달하려는 노력도 중요하다. 가령 기억력과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노인에게 치료의 전 과정을 다 설명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이 분들에게 더 필요한 건 다음 번 병원에 오는 날짜가 언제인지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병원에서 환자에게 진료실, 수납장소, 검사실, 약국 등 들려야 할 곳들을 번호 매겨가며 순서대로 표시해 주는 관행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환자가 그 동선을 다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동선 전체를 한꺼번에 설명해주기 보다는 바로 다음번에 들릴 곳이 어디인지만을 분명하게 전달해주면 된다. 대형종합병원이나 복지부 등이 국민들에게 건강 정보를 전달하는 웹사이트를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다. 이 때도 문제는 종종 정보가 적은 것이 아니라 너무 많기 때문에 생긴다. 뾰루지 생긴 것 때문에 건강 정보 웹사이트를 찾았는데 수 십 페이지에 달하는 내용을 읽어야 한다면 대부분은 기겁을 할 것이다.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필요한 만큼의 정보를 주는 체계가 필요하다. 무인 자동차가 곧 나올 것처럼 소란스러우니 건강 정보 하이웨이를 주행하는 환자들도 이제 스스로 건강 정보를 찾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날이 올 때까지는 사람들의 능력과 필요를 고려해서 의료 정보를 제공하려는 세심한 노력이 필요하다.

저작권자 © 청년의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