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주현 서울시의사회 홍보이사 겸 대변인

[청년의사 신문 최주현] 협동조합이 화두다. 2012년 ‘세계 협동조합의 해’를 맞아 협동조합 관련 법제를 정비하라는 UN과 국제협동조합연맹의 권고에 따라 협동조합 기본법 제정이 이루어지며 협동조합 설립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2013년 컨설팅 회사 맥킨지는 한국의 협동조합 열풍에 대해 “한국이 지금까지 재벌 중심 수출형 성장을 해왔지만 국가 경제 발전과 삶의 질 향상으로 연결되지 않고 있어 새로운 성장 경로를 찾아야 한다”고 언급하며 협동조합 등 사회적 경제를 대안 중 하나로 제시했다.


생산자 협동조합의 역사는 길다. 길드로 일컬어지는 중세 유럽의 동업자 조합에서부터 우리나라의 농업협동조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가 있다. 미국의 의료협동조합은 병의원들이 의료행위에 필요한 각종 장비, 기기, 소모품을 공동 구매하여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설립한 경우가 가장 흔한 형태이다. 좋은 조건에서 환자를 치료하고 지역 의료서비스 제공을 위해 설립된 경우도 있다. 1910년대 의료기관들이 구매 협동 조합을 결성한 것이 시초였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역 의료서비스를 네트워크 형식으로 제공하기 위해 의료협동조합이 결성됐다. 이들 협동조합은 회원 병의원에 대해 행정, 법률, 재무 상담 서비스, 전산 등의 업무를 중앙에서 대행해 주어 병원 운영에 따른 비용을 절감시켜 주는 효과를 제공한다. 캐나다에는 노인에 대한 보건 의료서비스를 위한 의료협동조합들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의료 공급자 협동조합들이 생겨나고 있다. 치과의사들은 1970년대부터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어 조합원에게 이익을 돌려주는 금융, 쇼핑몰 사업 등을 벌이고 있다. 대한비뇨기과의사회는 지난해 비뇨기과의사회 협동조합을 설립했다. 이를 통해 공동 구매 형태로 진단, 치료 관련 의료기기와 의약품 등을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고, 구성원 복리 증진과 교육 정보 제공 및 타 단체와 협력하여 국민 경제 발전에 기여하고자 한다. 점차 어려워지는 개원가 현실에서 조합원의 진료, 경영에 현실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분야 및 여가 생활 등 삶의 질을 높이는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서울 성북구의사회, 경상남도 의사회도 협동조합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최근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의 형태의 의료생협이 난립하여 의사가 아닌 사무장이 의사를 채용하여 운영하는 사무장병원 형태로 보건 의료서비스를 악화시키는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지역 의사 중심 공급자 협동조합이 이러한 의료생협의 기능을 대체하고 단점을 보완할 수 있다.

2014년 3월 휴진 투쟁 및 초유의 의협 회장 탄핵 사태 이후로 의료계는 몇 가지 숙제를 안게 되었다. 첫째, 현재 의사 사회를 이끄는 리더들은 대표성을 갖추고 있는가? 둘째, 의료계의 대표들은 현재 의료계의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가? 셋째, 대한의사협회는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적합한 조직인가? 첫째 과제는 소위 ‘의협 내부 개혁’ 이라는 목표 아래 대통합혁신위원회에서 제기된 몇 가지 내부 개혁 과제들을 이행하며 개선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월 26일 의협 대의원 총회에서는 ‘직선제 원칙’에 의해 선출된 대의원들이 모여 의료계의 제반 문제들을 다룬다. 둘째 의료계 문제 인식에 관하여는 미국의사협회의 AMA policy에 대응하는 KMA policy 수립이 논의되고 있는 단계다. 셋째 문제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조직 정비가 필요하다는 의견과 의료법상 중앙회로서의 의협은 허울 좋은 관제 단체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견해가 맞선다.

2000년 파업과 2014년의 휴진 투쟁을 비교해보면, 2000년 투쟁이 의사들에게 전문성(의권)과 자율성(조제권)이라는 가치를 지키려는 일종의 성전(聖戰)으로 받아들여졌다면, 2014년에는 대리 투쟁의 양상이 나타나며 소수가 투쟁을 벌이는 무임 승차 문제가 확대됐다. 의사가 점차 의료 노동자로 변화하는 시대에 휴진으로 인한 불이익을 감수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의료계 내부 분화가 일어나며 과별, 기관별, 지역별, 세대별 이해 관계가 벌어졌고 동업자간 경쟁이 심화됐다. 이러한 현실에서 의사회는 자체 역량을 갖추고 대표 단체로서 회원 중 낙오자 구제의 안전망을 마련하고, 공급자간 과당 경쟁 및 진료 외 비용 지출 증가를 막아야 하며, 전문가 단체의 위상을 회복하고 회원의 공감대를 얻어내야 한다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

협동조합 전문가들은 협동조합이 ‘갑’의 횡포에 시달려 온 우리 사회에서 ‘을’ 중심 사회적 경제의 해법이자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협동조합 기본법에 명시된 대로 협동조합은 조합원 이익에 충실하고, 조합원은 출자 금액에 관계없이 동등한 의결권을 가지며 가입과 탈퇴가 자유로운 민주적 운영이 중요한 원칙이다. 법적 제도적 체계가 아직 완전하지 않지만 민주적 대표성을 갖추고 공급자의 이해를 공유하게 하는 협동조합 체제의 도입은 현 의협 체제에 실망한 의사들에게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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