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절차 개시 시 피신청인 동의 조항은 잘못…중재원, 치유적 사법기관 돼야


[청년의사 신문 곽성순]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하 중재원) 추호경 원장이 지난 3년의 임기를 마치고 이달 퇴임한다.

추 원장은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보건학 석·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1978년 사법시험(20회)에 합격, 서울지검 고등검찰관과 법무부 법무심의관, 서울지검 형사1부장검사, 대전지검 천안지청장을 역임한 법조인 출신이다.

특히 의료분쟁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대한의료법학회, 대한보건협회, 복지부 건강보험분쟁조정위원회 등에서 활동하는 등 의료·보건 분야에 관한 논문 및 저술 활동을 통해 의료·보건 분야 전문 법조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중재원장 재임 시 추 원장은 ‘불가항력 분만사고 보상제도’에 대해 의료계와 날을 세우고 ‘의료분쟁조정중재제도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이 있다’는 말을 할 정도로 소신있는 발언을 아끼지 않았지만, 의료분쟁조정중재제도가 의료인과 환자 간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지난달 31일 추 원장은 퇴임 기자간담회에서 일부 의료계 지도자의 경직된 사고를 걱정했지만 중재원을 이용해 조정에 참여한 의료인에 대해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다음은 추 원장과의 일문일답.

-중재원 초대 원장으로 지난 3년을 반추한다면.

힘들었지만 보람된 시간이었다. 거창하게 얘기하면 제 삶의 큰 줄기가 중재원 초대원장으로 모두 집약되는 것 같다.

제가 검사가 되고 보건의료 전담을 일찍, 그리고 장기간 맡았던 것, 보건대학원 석박사 과정에서 보건의료 관련 공부를 한 것,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입법심의관과 법무부 법무심의관으로 법제 업무를 맡아 해 본 것, 대한의료법학회와 대한보건협회 등 학회와 관련 단체에서 활동을 해 왔던 것, 사법연수원 교수로서 예비법조인들에게 ‘의료과오 손해배상’을 가르친 것, 변호사로서 대한병원협회 법률고문을 맡았던 것이나 환자 쪽을 대리해 여러 건의 어려운 사건을 승소로 이끈 경험이 있었던 것 등등이 모두 중재원 초대원장을 잘 하라고 준비시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사실 취임 초기에는 속된 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 들었고, 각종 규정과 업무 매뉴얼 등을 만들면서 과연 이 제도가 잘 시행될 것인가 걱정도 많았었는데, 상임위원들과 직원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해주셔서 생각보다 빨리 안착이 되고 업무도 제대로 돌아가게 됐다. 작년 처음 받은 기관경영평가에서 A등급을 받은 것도 큰 보람 중의 하나인데, 그 후 직원들의 사기가 크게 올라갔고 더욱 열심히 하고 있다.

-의료기관과 환자의 저조한 중재 참여율이 계속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재임기간 동안 고민이 많았을 텐데.

먼저 조정절차 개시에 피 신청인의 동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법 제27조 제8항은 매우 이례적인 입법례로서 잘못된 조항이다. 그리고 초기에 일부 의료인단체에서는 중재원 조정절차에 절대 참여하지 말라고 공문을 발송하고 회원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는데, 사실 좀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상임위원들과 직원들에게 “법이 잘못됐음을 탓하거나 참여거부를 하는 의료인을 비난해 봐야 소용없다. 접수되는 한 건 한 건을 정확하고 공정하게 잘 처리해서 신뢰를 쌓아가야만 우리 원이 환자 측과 의료인 측 모두에게서 사랑받는 기관이 되고 의료분쟁 해결의 중심축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행히 조정개시율이 2012년 38.6%에 불과했는데, 점차 상승해 올해는 48.9%에 이르렀으며, 조정성립률도 90%대를 유지해 의료인들도 차차 중재원의 진정성을 이해해주는 것 같다.

다만 시간과 비용이 크게 절약되고 의료사고 관계자들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등 장점이 있는 이 제도를 두고 아직도 많은 의사들이 형사 피의자로나 민사소송의 피고로 시달리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법조계에서 중재원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은데, 법조인 출신으로 고충은 없었나.

법조계에서 중재원을 나쁘게 보는지 잘 모르겠다. 환자 측이 중재원으로 조정 신청을 많이 하게 되면 의료 전문 변호사들이 의료소송 수임 건수가 줄어들 염려가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그럴 가능성이 있긴 있다. 그러나 그런 막연한 우려 때문에 중재원을 나쁘게 볼 법조인은 없을 것 같고, 실제로 중재원의 조정위원감정위원으로 참여하는 의료전문 변호사들은 우리 사회의 갈등 해소에 일조한 것에 뿌듯한 보람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중재원의 ‘수탁감정’을 이용한 판사와 검사들은 이제 맘 놓고 재판과 수사를 할 수 있다고 전적인 신뢰를 보이고 있으며, 현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보내는 의료분쟁 사건만 받고 있는 ‘연계조정’(소송 사건을 일단 법원 외의 기관에 회부하여 진행하는 조정 절차)을 다른 법원의 사건도 받아 달라는 요청이 많이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다. 재임 중 법조계의 시선 때문에 불편한 것은 없었다.

-중재원에 대한 의료계의 불신이 좀처럼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소통의 중요성도 강조하셨는데, 성과를 평가하신다면.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의료계가 중재원을 불신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어려운 처지를 호소하는 과정에서 중재원을 거명하는 것뿐이라고 본다. 중재원이 구체적으로 뭘 잘못했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사실 법에는 문제가 좀 있다. 그러나 조정사건 대리인 범위의 제한, 방문현지조사의 요건 및 절차, 조사 기피방해 등에 대한 벌칙조항, 감정서 및 조정절차 진술의 원용 금지 규정 미비 등 문제는 이미 우리 원에서 개정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냈고, 실제로 운영도 전향적으로 하고 있어 아직까지 이 조항들 때문에 의료계가 불편해하는 사례는 특별히 생기지 않았다.

소통, 참 중요하다. 중재원의 핵심가치도 ‘공정, 신속, 소통’이다. 사실 저 만큼 광범위하게 의료인들과 친분이 두터운 법조인도 드물다. 그동안 여러 네트워크를 활용해 서울과 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많은 의료인들을 만나 의료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고, 의료분쟁조정제도를 제대로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또한 상임위원을 비롯한 중재원의 모든 직원들은 감정과 조정 절차를 통해 환자의료인 간에 신뢰가 향상되도록 애쓰고 있다. 이러한 노력에 대한 성과라면 조정참여율이 50% 가까이로 상승하고 90% 선의 조정성립률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불가항력 의료사고를 둘러싼 갈등이 여전하다. 해결책은 없겠나.

현재 불가항력 의료사고 보상재원 분담금은 2/3 정도가 납부했는데, 제도에 대한 불만이 있으면서도 이렇게 협조해주신 분만의료기관 관계자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산과 분만사고로 인한 사건의 조정참여율이 61.5%로 여타 진료영역에 비해 가장 높고(평균 45.7%), 조정성립률도 94.6%나 돼 매우 조정이 잘 이뤄지고 있다. 이런 수치로 볼 때 중재원과 산부인과 개원의 사이에 무슨 갈등이 있다고 보는 건 좀 무리가 아닐까 싶다.

그래도 불가항력 의료사고 보상제도에 대한 반감은 크게 남아 있다. 이 제도를 반대하는 분들이 주장하는 대로 불가항력 의료사고 보상제도가 산부인과 의사들을 옥죄고 진료의욕을 꺾는 것이라면 가장 빠른 해결책은 그 제도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너무나 아깝다. 이 제도가 ‘환자 측의 물리적 실력 행사’를 막는 데 매우 유용한 제도이고, 또 그 제도 이용 사례가 늘어나면서 실효성도 상당하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물론 현행 제도에 문제점도 없지는 않다. 법의 규정 형식도 문제이고, 그 제도 운영을 국가나 중재원이 직접 나서서 맡게 규정돼 있는 것도 입법론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분만의료기관들의 협의체에서 자율적으로 보상기금을 형성하면 그 액수의 2배 또는 3배 식으로 국고 보조를 해줘 산부인과 의사들 스스로 그 기금을 운영하도록 하는 것이 올바른 방식이라고 본다. 그렇게 한다면 거부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위헌 논란이 생길 여지가 없을 것이다.

여러 장점이 있는 제도이므로 일단 시행해 보면서 그 운영 주체 및 재원 분담 등의 문제를 차차 개선하도록 하는 것이 정도가 아닐까 한다.

-의료계에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중재원을 이용했던 의료인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들은 조정 과정에서 진지하게 조정위원심사관의 말을 경청했고 또한 환자 측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며, 때로는 큰 양보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이 있기에 앞으로 환자 측이 의사들을 전적으로 신뢰할 날이 곧 오겠구나 하는 낙관적인 기대를 갖게 됐다.

그런데 의료계는 그 내부에서도 너무나 이해관계가 엇갈려 전체적으로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이 큰 걱정이다. 전문 분야, 의료기관이나 근무 형태, 세대, 출신대학 등등의 각 분파를 뛰어넘어 대승적으로 단합된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이 의료계의 제일 시급한 과제라고 본다.

의료계를 이끈다는 일부 인사들의 사고가 너무나 경직돼 있는 것도 우려된다. 어느 조직이건 그 지도층 인사는 조직 구성원에게 실질적으로 이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고 그쪽으로 이끌어야 하는데, 의료계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매우 안타깝다. 제가 도울 수 있는 기회도 꽤 있었는데 결국은 도움을 별로 못 주고 임기를 마치게 돼 아쉽다.

-마지막으로 향후 중재원의 발전 방향과 후임자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중재원은 준사법기관이다. 그러나 옳고 그름만 정확히 판단한다고 해서 그 소임을 다 했다고 할 수 없다. 법원이 ‘사법적 정의(judicial justice)’를 구현하는 곳이라면 중재원은 거기서 더 나아가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까지 실현하는 치유적 사법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환자 측과 의료인 측 모두를 따뜻하게 보듬어 의료분쟁으로 받은 상처를 깨끗이 낫게 해야 한다. 그래서 중재원 원훈도 ‘바르게, 따뜻하게’라고 한 것이다.

그 동안 의료 감정이 의료계 쪽으로 편향됐던 것도 의료분쟁이 격화됐었던 이유 중 하나였는데, 앞으로 중재원 감정단의 전문성과 공정성을 잘 살려 수탁감정 등을 더욱 활발히 함으로써 환자 측과 의료인 측 모두가 신뢰하는 최고의 의료감정기관으로 발돋움해야 할 것이다.

또한 사후적인 분쟁 해결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감정과 조정 사례들을 축적하고 관련 연구와 교육을 통해 여러 의료기관에서 의료사고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도록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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