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대 박종훈 교수

[청년의사 신문 박종훈] 의료기관 인증평가에 대한 현장의 불만이 연일 터져 나오고 있다. 가장 주된 불만은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해서 어렵사리 평가를 받았으나 무엇이 좋은지를 모르겠다는 것과 평가자들의 고압적인 평가 태도다. 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된 것이기도 하다. 기억을 더듬어 의료기관인증평가가 시작되던 시점으로 돌아가 보자.


당시 병원평가라는 것이 너무 형식적이고 의료기관의 질 향상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마침 몇몇 대형병원들이 JCI 인증을 받은 것이 정치권에서도 문제가 되던 터라 정부는 인증평가라는 제도를 서둘러 도입했다. JCI를 의식한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인증평가의 상당 부분이 JCI의 기준과 형식을 그대로 베낀 것임을 감안한다면 그러한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JCI 기준과 형식을 그대로 도입한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애써 절대 아니라고 하니 희한하다 생각했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한국의 인증평가가 졸속으로 도입되는 것에 대해 반복해서 지적한 적이 있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의료기관의 질 향상, 즉 환자 안전을 중점으로 평가하는 인증평가의 도입은 시대적으로도 적절하고 바람직한 일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인증평가 도입을 위해서는 전제가 돼야 하는 것들이 있다. 첫째는 인증평가를 통해 의료기관의 환자 안전의식이 실질적으로 향상돼야 하며 그것이 의료기관의 자발적인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즉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경우 인증평가가 의료기관의 자발적인 신청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인증여부가 기관의 존폐에 영향을 미친다. 인증여부가 바로 수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즉, 인증평가를 통과하지 못하면 보험사로부터 적절한 수가를 보장받지 못하고 도태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보험사는 불필요한 의료사고를 줄이려고 노력하는 기관에 인센티브 개념으로 수가를 연동하는 것이니 병원이 기를 쓰고 인증평가를 준비할 수밖에 없다. 한편 의료기관의 실질적인 환자 안전 문화 정착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평가 전에 컨설팅을 통해 철저하게 변화를 모색하고 평가 자체는 우리의 평가처럼 지적질 위주의 평가가 아닌 토론 형식으로 진행을 하게 돼 있다. 이러한 방식에서는 병원 스스로가 돌아봐도 인증평가를 통해 병원이 참 많이 좋아졌다는 자체 평가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어떤까? 일단 왜 하는지에 대해 공감대가 형성돼 있지 않다. 알기는 아는 것 같은데 가슴으로 와 닿는 일은 아니다. 그러니 왜 하는지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죽어라 준비만 하는 것이다.

두번째 문제는 인증평가는 평가 자체보다 준비 과정이 훨씬 중요한데 우리의 경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오랜 인증평가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들은 인증평가제를 잘 이해하고 있는 현장형의 컨설턴트들이 대거 포진해 이들을 통해 병원이 환자안전을 향해 나아가도록 유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사전 학습을 통해 인증제의 취지와 방향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 평가는 힘은 들어도 만족도가 높은 행사로 이어질 수 있으며 뜻밖의 좋은 아이디어들이 현장에서 탄생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이런 면들이 대거 생략돼 있다. 시험의 요령만 터득하기에 급급하니까 실력이 향상될 리가 없고, 반복되는 시험에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평가자들이 미숙한 시절에는 겸허했으나 어느 정도 이력이 붙어서인지 종종 현장에서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나라 의료기관인증평가제의 도입서부터 현재까지의 모습을 보면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의미를 잘 모르면서 일단 해보고 보자는 식이다. 이런 것이 가능한 이유는 관주도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도 민간이 항의하기가 쉽지 않고, 그러한 문제가 고위층에 전달이 제대로 될 가능성이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쉽게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시행에 참여한 공무원이 지속관리 하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인사이동을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될 때쯤이면 그 자리에 없을 가능성이 100%다. 더더욱 문제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 집단이 올바른 지적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리보전을 위해서 절대로 정부 당국자의 귀에 거슬리는 지적은 안한다.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만 실무에서 배제될 뿐이다.

몇 년 후 의료기관인증제를 어떻게 가져갈지 눈에 선하다. 아마도 쉽게 인증평가를 통과하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게 평가자나 피평가자 모두에게 좋기 때문이다. 쉽게 통과되면 찜찜해도 의료기관들이 대놓고 불평은 안 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환자 안전을 위해서 시행하는 제도의 근본취지는 실종될 것이다. 대한민국 제도가 늘 그렇듯 말이다. 그러다보면 제도의 무용론이 나올 것이고 아마 후속으로 새로운 제도를 모색하지 않을까. 지금이라도 인증제의 근본 취지를 잘 이해하고 전향적인 방향으로 전환을 하지 않는다면 위에서 언급한 대로 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경험에 의하면 아주 높은 지위의 사람이 정확히 인지하지 않는 한 나의 바람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게 대한민국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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