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인 충청남도 소방본부 공중보건의사

[청년의사 신문 청년의사] 1.

때는 아이스 버킷 챌린지라는 것이 유행이었다. 루게릭 환자를 돕는다는 취지 아래 사람들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각자의 머리에 얼음물을 쏟아붓고 그것을 여기저기에 자랑했다. 그 광경을 TV로 보며 나는 이전에 내가 진료했던, 흔한 루게릭 환자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2.

루게릭은 진단 후 약 3년에 걸쳐 근육이 마르고 비틀어지는 병이다. 처음엔 물 잔을 떨어뜨리는 것에서 시작하여 점차 문고리가 돌아가지 않고, 걸어 다닐 수가 없게 되다가 서지도 앉지도 못하게 되면 눕는다. 이 상태에서 사지의 기능을 상실하면 대소변을 받아야 하고, 먹고 삼키는 능력을 잃으면 실낱같은 유동식에 의지하다 호흡능력을 잃는 순간 죽는다. 가장 참혹한 점은 죽는 순간까지 맨 정신을 유지할 수가 있다는 거다. 머릿속에서 째깍거리는 3년의 시간, 진행되는 사지의 마비, 인간으로의 존엄이 벗겨지고 있다는 것이 환자를 조인다. 세상은 사라질 것이 뻔한 자에게 그리 우호적이지 않으므로 죽음을 앞둔 가까운 이들의 동정, 측은한 눈빛과 홀연한 배신도 견뎌야 한다. 3년간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공포와 두려움이 온다.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짧은 영화 한 편으로 만들고, 슬프다고 짧게 말한다. 무례한 일이다. 3년을 나누어서 매일 자기와 주변인에게 배달되어 오는 죽음이라는 오열을, 곁에서 경험하지 않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3.

흔한 루게릭 환자였다. 흔한 딸 둘을 키운 오십 대의 주부였다. 3년 전 피곤한 기분에 찾아간 병원에서 루게릭이 진단된다. 그 후론 명쾌히 차도가 없는 죽음의 외길뿐이었다. 본인의 육체는 명멸하고, 온 가족이 위약해지는 어머니를 떠안았다. 자신의 아내와 어머니가 죽어 가는 꼴을, 어떤 날은 침울하고 어떤 날은 오열하고 하루쯤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도 하는 광경을 3년간 지탱하고 묵도한다. 괴물 같은 불행이 온 가족을 휩쓴 막바지엔 병의 경과로 어머니는 30㎏짜리 뼈다귀가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된다. 자리 보전 뒤 한 차례 호흡근 마비가 있어 기적적으로 생환한 이후 어머니는 공식적으로 죽었다. 그녀는 미리 다시 호흡근 마비가 올 경우에는 어떠한 생존 노력을 하지 않겠다는 동의서에 사인을 하고,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올지 모를 죽음을 기다리며 그녀는, 지긋지긋한 삶을 끝내게 해 달라고, 자기와 자기 가족들에게 펼쳐진 불행을 지금이라도 없애 달라고 남은 기력을 모아 매일 중얼거렸다. 이것이 그녀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애써 한 일이다.

4.

시신과 다름없이 지내던 며칠이 지나고 그녀는 간호사인 딸 앞에서 두 번째의 호흡 부전을 겪는다. 공식적으로 죽은 어머니지만, 어떤 딸이 눈앞에서 숨이 멎은 어머니를 방치할 수가 있는가. 순간 동의서의 내용을 까맣게 잊은 딸은 곧장 심폐소생술을 해서 어머니를 다시 세상으로 데려온다. 그래서 호흡과 의식이 없는 30㎏의 육신은 응급실로 내원해 내 눈앞에 던져지게 된다. 난처한 상황이었다. 나는 일단 살아난 환자이니 환자를 포기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치료되는 병이 아니므로 치료할 명분도 없었다. 어쩔 도리가 없어 가족들에게 이 병원에서 또 심정지가 발생하면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겠다는 동의서를 다시 받았다. 그리고 치료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므로 살아나면 죽을 것이 자명한 이 환자를 살리기 위해 중환자실에서 며칠간을 치료했다. 이것은 일정한 타협의 결론이었다. 그리고 일시적인 마비였으므로 공식적으로 죽은 그녀는 다시 세상에 돌아온다. 그녀가 입을 열게 되어 한 말은 자신을 집에 보내 달라고, 그리고 죽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5.

세 번째 호흡부전은 예상보다 일찍 찾아왔다. 이틀 뒤, 집으로 한 발자국도 옮기기 전, 중환자실 퇴원 수속 중에 그녀의 호흡근은 다시 멎었다. 어떤 의사가 숨이 멎은 사람을 방치할 수 있는가, 회진을 돌다 심정지를 발견한 사정 모르는 내과 의사는 그녀의 갈비뼈를 부수고 심박을 돌려놓았다. 허나, 호흡은 여전히 없었다. 나는 달려가 마스크 한 개로 그녀의 생명을 부지하고 보호자를 급하게 불러 모으고 그들에게 설명했다. ‘마지막 결정의 순간입니다. 이를 떼면 영원히 잠에 빠져들 것이고, 치료한다면 이전 일들의 반복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저 멀리서 뛰어오는 가족은 이미 어서 이 지옥과도 같은 고통과 불행을 끝내 달라고 소리치며 달려왔으니까. 나는 마스크를 떼고 환자가 5분 후에 사망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공식적으로 죽었고, 의학적으로 아직 죽지 않은 그녀의 사망 선고를 위해서 나는 머리맡에서 심장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만일의 일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죽어야 함으로 만일의 일은 그녀가 살아나는 것이다. 나는 죽음을 대비함이 아닌, 삶을 대비해서 그 자리에 있었다.) 그것은 아직까지 기억에 생생한 큰 실수였다.

6.

평생을 사랑했고, 5분 뒤에 죽을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 언니에게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있는가? 몇 년간, 그리고 평생 쌓인 슬픔이 터져 나올 순간을 생각할 수 있는가? 그런 상황에서 그런 말들이 머릿속에서 정리되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가족들은 환자의 한 부분씩을 점거하고 한 명은 머리를 박고, 한 명은 머리를 쥐어뜯고, 한 명은 목을 맨 채로 다른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무조건 사랑한다고 사랑했다고 엄마 평생을 사랑했었노라고. 중대하건, 사소한 일이건 전부 사랑했다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소리와 미안하다고 대신 죽지 못해서, 자기가 준 고통에 있어 엄마가 받은 고통은 내 것이어야 한다고, 모든 것이 미안하다고. 제발 미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전해진다면 죽을 수도 있다고. 자기는 어려서도, 커서도 너무 미안했다고 소리치는 소리와 당신을 만난 순간부터 행복했고 깊이 사랑했다고,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자신의 아내로도 사랑했고, 두 아이의 엄마로도 사랑했고, 그냥 존재로도 사랑했다고, 제발 사랑했다고. 제발 이 병을, 어서 눈을 감고 저주받은 병을 버려, 행복하게 살라고.

나는 알몸으로 날카로운 창 앞에 선 기분이었다. 시린 바닥에 널린 깨진 유리조각 위를 구르는 느낌으로 온 전신이 따가웠다. 아니, 차라리 그런 것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거대한 슬픔에 나는 헐벗은 무방비였다. 항거할 힘도, 의지도 없었다. 이 압도적인 오열은 수없는 비수가 되어 나의 전신을 꿰었다. 관통된 자리에서 선혈이 흘러 발밑에 고였다. 아아, 나는 슬픔 앞에 너무 무력했다.

7.

5분 후 약속대로 그녀의 불행은 끝났다. 심박은 평행선을 보였고, 나는 사망 선언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무엇인가 가슴을 찌르고 있어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못했다. 나는 간신히 입모양만으로 사망을 선언했다. 그리곤 사체를 유족들에게 넘기고 서둘러 빈 곳에 숨어들었다. 그곳에서 나는 한동안 눈앞에서 겪은 실제하는 비극에 대해서 마음이 안정될 때까지 울어야 했다. 울고 있는 것조차도 너무 보잘 것 없어 죄송한 마음으로 울었다.

8.

TV에서 얼음물을 뒤집어쓴 사람들은 차가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깔깔대며 밝게 웃었고, 그 다음 참가자가 될 친구들의 이름을 약 올리듯이 불렀다. 그곳에는, 마치 슬픔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아 보였다. 나는 리모컨을 들어 웃음소리가 들리는 TV를 끄고, 내가 겪었던 슬픔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받는 그들에 대해서 깊게 기도했다.

수상 소감

내가 울어 낸 만큼의 글


쓰기로 했다. 써야 한다. 하지만, 쓰는 것은 너무 괴롭다. 이런 식이다. 나는 루게릭병 환자의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그 일을 겪었을 때 나는 당연히 울었다. 그리고 다음 날 글을 쓰기로 마음속으로 약속하면서 미리 조금 더 울었다. 그래서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책상 앞에 앉는다. 시작하는 일이 너무 괴로워서 방도 한번 둘러보고, 물도 한 잔 떠 온다. 이것은 두려운 일을 피하는 인간의 본능과도 같다. 나는 끝내 첫 문장을 써내고 울기 시작한다. 글이 나아갈 전개가 절망적이라 그렇다. 문단 하나하나가 괴물같이 슬프다. 한번 울기 시작하면, 문장이 겉돈다. 운다는 것에는 그 전에 울었던 순간을 관통해서, 온갖 슬픈 일을 불러 놓는다. 그래서 울더라도 다른 생각 없이 마음을 다잡고 우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성을 부여잡고 다시 한 문장씩 쓰기 시작한다. 컴퓨터 화면의 글은 그래서 간신히 기어간다. 나아가지 못하는 흰 화면은 벌거벗은 듯이 환하다. 빨리 써서 괴로움을 끝내고 싶다. 하지만 일찍 말해 버리면 안 된다. 늦더라도 모든 것을 말해야 한다. 감정이 글의 말미까지 버텨 줘야 한다. 감정이 바닥나는 순간 글은 더 나아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울지 않고 남을 울릴 수가 없다. 사람들이 우는 만큼을 더해서 울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읽을 사람들에게 죄송스러워질 뿐이다. 이것이 한 사람이 감당해 낼 수 있는 일인가? 하지만 써야 한다. 나는 쓰기로 했지 않은가.

글이 된다. 된 글을 보면 도저히 내가 써내어 놓은 글 같지 않아서, 보면서도 다시 운다. 나는 목격자이면서도, 필자이면서도, 이젠 독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세 가지가 전부 나에게 있으니 필경 울 수밖에 없는 노릇 아닌가. 이 과정을 한번 거치면 손 하나 까닥 못 할 정도로 지쳐 버리곤 한다. 그래서 슬픈 글을 완성하는 것을 여간해서는 견디기 힘들다.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가 혼자 두려워 모른 척 하기도, 어느 순간에는 미워지기까지도 한다. 써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자꾸 달아나려고만 했다.

추위가 몰아치는 길거리에서 수상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은 내가 마음을 쏟았던 슬픔이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졌다는 내용으로 들렸다. 그리고 내가 괴로워 한 것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그것은 필요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써야겠다. 그리고 써야 한다. 마음속에 있는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은 채. 그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이 상이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나약한 내 마음을 다잡게 해 준 한미수필문학상 관계자 여러분들께 심심한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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