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찬의 통(通)하는 의료

[청년의사 신문 김용찬] 지난 주 동경에 다녀왔다. 동경과 그 인근 도시에 있는 주민 자치 현황을 보기 위해서였다. 2박 3일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여러 장소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동경 분쿄구(區)에 사는 노인들과의 만남이었다. 이미 현직에서 은퇴한 이들은 ‘생애학습’이라는 모임을 만들어서 같이 모여 책을 읽고,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 함께 공부하고 있었다. 지역 내 문제에 대해 같이 논의하기도 하고, 동네 신사를 중심으로 마을 축제를 함께 기획하고, 봉사활동도 같이 하고 있었다. ‘좋은 커뮤니티란 무엇인가’ 하고 묻자 무역회사에서 일하다 은퇴한 구로키 씨는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새로 들어오는 사람을 잘 받아주는 곳’이라고 했다. 새로운 사람을 배척하고 편한 사람들하고만 소통하는,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곳은 결국 쇄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본의 70대 노인들은 전후세대이자, 우리로 치면 486세대에 해당하는 학생운동 세대다. 그래서 일본 사회에서는 다른 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리버럴한 분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렇게 “깨인” 생각과 활동들을 하고 계신 것일까? 아무튼 평범한 동네 노인들로부터 커뮤니티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들어있는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가 놀라운 경험이었다.


또 인상적이었던 것은 동경 주쿄구(區)에 사는 40대, 50대의 중장년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주쿄구청의 지원을 받아서 일종의 마을 리포터 역할을 하는 평범한 주부들이었다. 이들은 간단한 디지털 미디어 교육을 받고 그것을 이용해서 마을의 소소한 이야기를 찾아 기사화하는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디지털 미디어라고 해서 거창한 기기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디지털 카메라나 아이패드로 사진을 찍고 거기에 오디오를 입혀 기사를 만들고 있었다. 동네 케이블 TV 방송국은 이렇게 만들어진 내용 몇 개를 묶어 매달 방송을 해주고 있었다. 형식이나 내용은 매우 소박한 것이지만, 이들이 고백하는 경험은 귀 기울일 만한 것이었다. 남의 경험을 듣고, 사진을 찍고, 그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면, 자기 자신의 소리와 다른 사람 이야기 모두에 경청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런 것이 쌓이다보면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와 커뮤니티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지는 경험을 한다고 말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삭막한 아파트가 점령하고 있지만, 밑으로 내려와 골목으로 들어가 보면 우리 사회 안에도 주민들 사이의 소소한 만남과 연대가 싹트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동네 주부들이 함께 북카페를 차리기도 하고, 함께 공동 육아와 대안적 교육에 대해 고민하기도 하고, 아파트 옥상에서 텃밭을 함께 가꾸기도 하고, 피곤한 직장 생활을 마치고 모여 동네 신문을 만드는 이들도 있다. 예를 들어 도봉구 주민들이 함께 모여 만드는 <도봉N>이라는 신문은 매달 만부 정도씩을 찍어내면서 지역 행정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낼 정도로 규모와 영향력이 커졌다. 하지만 여전히 그냥 동네 골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민들이 그저 재밌어서, 보수도 없이, 함께 모여 만드는 신문이다. 최근 서울시내에만 해도 이런 식으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모임들과 매체들이 늘어나고 있다. 성북구에서는 동네 사람들이 <와보숑 TV>라는 이름으로 동영상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고, 종로구 창신동에서는 <덤>이라는 이름의 인터넷 라디오 방송국이 활동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사회 안에도 소통에 대한 욕구, 커뮤니티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의 연대에 대한 열망이 점점 커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믿을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 건강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연구 결과들이 최근 많이 나오고 있다. 소위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건강한 삶을 살고, 사회적 자본이 많은 사회가 그렇지 않은 사회 보다 더 건강한 환경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정보와, 돌봄과, 위로와, 격려와, 시간과 물질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는 것은, 스트레스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다치지 않게 지켜주는 에어백 같은 것을 갖추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우리 사회가 더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올바른 의료 보건 정책도 필요하고, 그에 따른 예산도 필요하고, 체계적인 캠페인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 그대로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분쿄구의 구로키씨가 말했던 새로운 사람을 의심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주는 공동체, 주쿄구의 동네 리포터가 말했던 나와 남의 목소리에 모두 경청하는 공동체 말이다. 진솔한 소통은 기술이 아니다. 나와 다른 남에게 마음을 열고 먼저 다가가는 것이다. 그럼 우리 모두가 건강해질 수 있다. 의사도 아닌 필자가, 커뮤니케이션과 공동체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에 감히 던지는 (너무나도 소박한) 처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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