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기의 좌충우돌

[청년의사 신문 이형기] 잘 나가던 검사 출신으로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근무하던 모 변호사가 해당 기업의 비자금을 폭로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변호사가 7년 동안 100억이 넘는 돈을 받았고, 퇴직 후에도 고문 변호사 자격으로 수억원을 챙겼다는 사실이 나중에 알려졌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대우 받을 것 다 받다가 왜 갑자기?’라며 시큰둥했다. 대기업의 불법 행위에 면죄부를 주었다기보다는 폭로자의 과거 행적이 생뚱맞아 공감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결국 이 폭로는 석연치 않은 내부고발자 코스프레로 막을 내렸다.

최근 국민건강보험공단(이하 공단)이 담배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2001년부터 10년간 흡연과 연관성이 높다고 알려진 세 종류의 암으로 진단받은 3,400여명의 흡연자들에게 지급한 진료비 537억원을 배상하라는 것.

사실 그동안 국내에서 개인이 담배 회사를 상대로 제기했던 수건의 소송은 모두 원고의 패소로 끝이 난 바 있다. 따라서 이를 모를 리 없는 공단이 흡연 피해의 직접 당사자도 아니면서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선 것은 의아하다.

공단의 변은 이렇다. 개인은 담배 회사를 상대할 만 한 정보력과 전략이 없었기 때문에 패소한 것이고, 공단이 보유한 빅데이터 등을 활용함으로써 소송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공단이 국민의 호위무사를 자처한 셈인데, 언제부터 이렇게 공단이 살가웠는가 싶지만 딱히 나무랄 일은 아니다.

담배 소송이 빈번했던 미국에서도 개인이 아닌 정부가 나선 적이 있기는 하다. 1999년 미 법무성은 담배 회사가 소위 ‘갈취 및 부패 조직 방지법(Racketeer Influenced and Corrupt Organizations Act)’을 위반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10년을 끌던 이 재판은 결국 원고인 미 법무성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러나 승소에도 불구하고 담배 회사에 대한 금전 배상 요구는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대신 여러 경로를 통해 담배 회사가 과거 행적을 고해성사하고 내부 자료를 공개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공단의 담배 소송도 험난하고 지루한 경과를 겪을 것이 예상된다. 벌써부터 공단이 과연 이 소송을 제기할 만한 자격 요건을 갖추고 있는지 논란이 분분하다. 공단이 주장하는 ‘재정적 손해’라는 것도 실체 입증은 차치하고, 피해자라 할 수 있는 환자를 우회해 직접 배상을 요구하는 것이 과연 절차적으로 타당한지 설득해야 한다. 미 법무성의 담배 소송처럼 승소하고도 금전 배상 요구가 받아 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소송의 근원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담배 회사가 납부한 (실제로는 담배 구매자가 부담한)국민건강증진기금에서 공단은 소위 ‘건강보험 지원’이라는 형태로 지난해에만 1조원이 넘는 돈을 받는 특혜를 누렸다. 그리고 이는 전체 기금의 절반이 훨씬 넘는 엄청난 금액이다. 몇년 동안은 기금의 대부분이 공단의 재정 적자를 메우는 데 쓰인 적도 있었다.

따라서 담배 회사의 흠을 입증하는 것과는 별개로, 과연 공단이 이러한 흠을 지적하는 것에서 자유로운지 따져 봐야 한다. 대기업에서 일반인이 상상하기 힘든 좋은 대우를 받다가 갑자기 그 대기업의 비자금을 폭로하며 내부고발자로 자신을 코스프레했던 모 변호사의 경우와 크게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담배 회사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공단이 담배 회사의 대척점에서 국민 건강의 수호천사를 자임하려면 소송 이전에 하다 못 해 제대로 된 금연캠페인이라도 벌이는 게 순서다. 그래야 ‘국민의 건강 생활 실천과 이를 지지하는 여건 조성에 사용해야 할’ 기금이 원래 목적과는 다른 용도로 쓰였다는 비판에서 벗어 날 수 있다(김혜련·여지영, 국민건강증진기금의 사용현황과 개선과제, 보건복지포럼, 2014년 5월).

솔직히 의료계에 당연히 지급돼야 할 진료비도 제대로 주지 않았던 공단이다. 이러고서도 담배 회사로부터 흘러 들어간 엄청난 액수의 돈을 십 년 넘게 받아 왔다는 것은 그 동안 공단의 경영이 얼마나 비효율적이며 방만했는지 반증한다. 이런 마당에 승소 확률이 높지 않고, 무엇보다 실제 국민 건강에 실익이 크지 않은 담배 소송을 벌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행여 부실 경영의 비판을 면하려고 공단이 의제 선점의 정치적 행보를 벌인 것이 아니길 바란다. 뭐 하긴 자기들 주머니 털어서 소송비를 마련하는 것까지 말리고 싶지는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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