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욱의 블루하우스


[청년의사 신문 박형욱]

지난 9월 11일 서울중앙지법원 이범균 부장판사는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에 대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는 무죄, 국정원법 위반 혐의는 유죄라는 판결을 내렸다. 정치적 중립의무는 위반했지만 선거운동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취지였다. 이에 대해 수원지법 성남지원 김동진 부장판사는 법원 내부 게시판에서 신랄한 비난을 가했다. “선거개입과 관련이 없는 정치개입은 무엇을 말하는가? 궤변이다, 입신영달을 위한 판결이라고 생각한다. 법치주의가 죽어가고 있다”고 말이다.

이 사건은 의료계와 거리가 있는 법조계의 일이긴 하다. 그러나 전문가 사이의 합당한 비판과 논의의 방법, 전문가와 일반 대중과의 의사소통 방법에 대해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불가피하게 약간의 법리적 문제들을 짚어 본다.

공무원의 정치개입과 선거운동이 문제된 대표적 사건이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이다(헌재 2004. 5. 14. 2004헌나1). 2004년 4?15 총선을 약 2개월 앞둔 시점에서 노 대통령은 공개 기자회견에서 “국민들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 줄 것을 기대한다. 우리당이 표를 얻을 수만 있다면 합법적인 모든 것을 다하고 싶다”고 발언했다.

당시 헌재는 아래와 같이 노 대통령이 선거에서의 중립의무를 위반했지만 공직선거법을 위반한 것은 아니라고 결정했다. 원세훈 판결과 사실상 동일한 판결이다.

“선거에 임박한 시기에 공정한 선거관리의 궁극적 책임을 지는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전 국민을 상대로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발언을 한 것은 선거에서의 중립의무를 위반한 것이다. 그러나 특정 후보자들을 당선 또는 낙선시킬 의도로 능동적·계획적으로 선거운동을 한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

헌재는 물론 대법원도 공직선거법상 선거운동의 개념을 ‘특정 후보자의 당선 내지 득표나 낙선을 위해 필요하고도 유리한 모든 행위로서 당선 또는 낙선을 도모한다는 목적의사가 객관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능동적·계획적인 행위’로 좁게 한정한다.(대법원 2012.11.29. 선고 2010도9007 판결) 그 주된 이유는 국민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선거운동의 개념을 넓히면 공직선거법의 적용범위가 넓어지고 혼탁한 선거를 강력히 규제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의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가 극히 제한된다. 이는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게 되는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다. 따라서 헌재와 대법원은 일관되게 공직선거법상의 선거운동의 개념을 제한해 온 것이다.

한 가지 목적을 위해 개념을 넓히면 다른 측면에서 부작용이 발생하는 경우는 의료분야에도 있다. 예를 들어, 정신보건법 제3조의 정신질환의 개념은 매우 넓다. 이는 정신보건사업의 범위를 넓혀 국민에게 많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정신질환은 면허·자격 제한, 강제수용 등 권리제한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정신질환의 법적 개념이 너무 넓으면 인권침해의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전문가라면 마땅히 양 측면의 문제점을 이해하고 균형 있는 논의와 비판을 전개할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판례와 그 속에 있는 법리를 둘러 싼 법원의 고민을 살펴보면 그것이 그렇게 비합리적이거나 비이성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의무와 공선법상 선거운동은 구분해야 하는 법적 개념이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김동진 판사는 동료 판사에게 정중하게 법리적 차원의 문제제기를 한 것도 아니고 사실인정에서의 문제제기를 한 것도 아니다. 그는 선거운동을 선거개입이라고 교묘하게 치환한 뒤 정치개입이 곧 선거개입이라는 식으로 조악한 상식에 호소하는 웅변적 비난을 가했다. 거기에 원세훈 판결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은 ‘명쾌하다, 상식적이다’라며 환호하고 있다.

전문가가 일반 대중을 향하여 정제되지 않은 발언을 쏟아내는 것은 매우 심각한 악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 의료계가 일반 국민과의 의사소통에 많은 노력을 기울어야 함은 사실이다. 그러나 의료인이 다른 의료 전문가와 충분한 토론을 거치지 않은 채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비난적 발언을 쏟아내서는 안 된다. 이는 문제 해결을 위한 협력을 만들기보다 오히려 오해와 갈등의 시발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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